Autism, 譫妄, 망상...

지금은 15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몸을 볼썽사납게 뛰뚱거리며 '거만하고 괴팍한 노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뿐이지만, 스타니 슬라브스키가 주창했던 메소드 연기의 탁월한 전도사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말론 브랜도에게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칼이수마가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론트>, <대부> 그리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르기까지 말론 브랜도를 떼어 놓고 그 영화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론 브랜도는 강렬한 칼이수마를 그 영화들 속에서 구현해 냈고 말론 브랜도 칼이수마의 최정점이자 최후로 나타난 영화가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을 찍으면서 난항을 거듭하던 코폴라는 고집불통 말론 브랜도의 갖가지 트집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약속한 만큼 체중을 줄이지 않고 나타난 브랜도는 스크립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커츠 대령이라는 이름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라일리 대령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제작진과의 대화가 순탄치 않게 되자 코폴라는 브랜도에게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죠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읽어 볼 것을 권유했고, <암흑의 핵심>을 읽고 난 브랜도는 다음날 아침 별안간 머리를 박박 깍고 등장하여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완전히 명백해졌다." 

그래서 똥꼬털에 묻어 있는 온갖 분미물들을 탈 탈 탈 털어내고 똥꼬 세척 재계한 후 면벽 참선의 자세로 각 잡고 앉아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단숨에 정독한 나는, "그래! 이제야 모든 것이 맵핵을 띄운 것 처럼 완죤히 분명해졌다." 라고 선언했.... 으면 좋겠다만... 졸라, 나는 브랜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박박 깍고 싶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 무려 삼주간을 오만가지 자료들을 긁어모으며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졸라 들뜨고 똥꼬 발발거리는 심정으로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였고 수십번도 더 본 <지옥의 묵시록> 비됴를 또 봤고 우연한 기회로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다시 한 번 관람하였으나 아직도 나는 포연에 싸인 정글의 한 가운데 내팽겨쳐져 있다.
 

'시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글케 골 뽀개는 영화였냐? 조뙜따. 영화사에 남을 전쟁 영화의 걸작이라구 해서 앤하구 같이 볼라구 예매해 놨는데 이제 앤한테 맞아 죽게 생겼따.' 라고 똥꼬 움찔거릴 넘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쫄 거 없다. 걍 가벼운 맘으로 가서 보믄 글케 잼없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다만 러닝 타임이 쫌 많이 긴 관계로 떵 같은 건 미리 미리 때려 놓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는 것은, 다른 모든 예술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어떠한 예술도 그것이 창작자의 의도 그대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는 없으며 대중은 각각의 개인적 경험과 환경에 의해서 똑같은 예술 작품에서 전혀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술에 탐닉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다양한 예술적 창조 작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온갖 찌라시들에서 나불거리는 대로 마치 전지구적 신화인양 고무찬양되고 똥꼬를 높이 치켜 들어 경배해야 마땅한 영화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온갖 찌라시들에서 한결같이 주둥이를 모아서 똥꼬를 치켜드는 꼬라지에
배알이 꼴려서 어떡하든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의 흠집을 잡아 볼라구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나오느니 감탄의 한숨이요 느껴지느니 쫄아든 뽕알같이 왜소해지는 나의 존재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광기를 탁월하게 묘파한 전쟁영화의 걸작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묘파했는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탁월한 건지는 두리뭉실 넘어가 버리는 여타의 찌라시들과는 격을 달리하여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면서 니덜이 니덜 앤한테 졸라 잘난 척 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보 및 해석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어때, 졸라 친절하지? 너무나도 너그럽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 아니냐?
보고 배워라, 응?
 

그러나 앞서 연막작전 핀 것처럼 나 역시 아직도 포연 가득한 정글에 빠져 있는 기분이며, 영화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므로 내 해석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보는 관점에는 이런 것도 있고, 어디까지나 니덜 앤한테 졸라 잘난 척 할 때 참고로 써 먹으라는 것뿐이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이다.
 

또한 내가 지금부터 풀고자 하는 썰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분히 포함될 것이므로 영화의 내용을 알고 영화를 보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는 넘들은 지긋이 '뒤로' 화살표를 눌러 주길 바란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읽고 나서 이 영화에 선입견이 생겨서 명랑영화관람 추구권을 침범당했다고 복날 썬오브독 처럼 앙탈부릴 태세를 갖춘 넘들 역시 지긋이 '뒤로' 화살표를 눌러 주길 바란다.
 

서론 졸라 길었다. 그럼 본론 들가겠다.
두두둥~ <-- 조또 웅장한 초저베이스 인트로 사운드로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는 이미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죠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1902년)에 영감을 얻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존 밀리어스와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서 1979년 갖은 사투 끝에 제작하였고, 그 해 깐에서 그랑프리 먹고 기타 여기저기서 주는 상 받아 먹다가 1979년 당시의 여러 사정상 짤라 내야 했던 부분을 복원하고 디지떨로 재마스터링하여 2001년 깐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22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세인들의 예민한 귀두를 꼴리게 한 장본인 되겠다.

이 영화의 탄생과 부활에 얽힌 기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천지 사방에 널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기본 정보만 가지고 바로 영화 속으로 쑥- 들어가 보자. 영화는 평화롭게 잎새가 팔랑거리던 조용한 숲이 네이팜탄의 시뻘건 불꽃으로 일순간에 삼켜지면서 시작된다. 

간간히 헬기의 프로펠라 돌아가는 소리가 꿈꾸듯 들리는 가운데 도어즈의 <The end>가 흐르고 불타는 숲을 천천히 보여 주던 화면 위에 윌라드 대위(마틴 쉰)의 거꾸로 누워 있는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 공허하고 무신경한 시선에는 초점이 없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녹음의 숲이 일순간에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에서 전쟁은 그렇게 급작스럽고도 전폭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린다는 것을 상징하고, 그 한가운데 거꾸로 처박혀 있는 우리는 이내 공허하고 무신경하게 전쟁 속에 함몰되어 갈 것임을 보여 준다.

이어서 등장하는 호텔방 씬에서 윌라드 대위 역의 마틴 쉰은 인간의 본질적 고독과 공허 속에서 드러나는 극렬한 광기를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해 냈다. 원래 윌라드 대위 역에는 하비 케이틀이 내정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약한 듯 하면서도 집요하고 상처받기 쉬운 듯 하면서도 강인하며 졸라 특이한 듯 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윌라드 대위라는 캐릭터에, 만만치 않은 칼이수마를 보유하고 있는 하비 케이틀의 색깔은 부조화스러운 감이 있어서 촬영을 한 달여 앞두고 전폭적으로 마틴 쉰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사실 하비 케이틀 이 넘, 칼이수마 하면 또 한 칼이수마 하잔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은 시종일관 윌라드 대위의 시점을 따라 가고 윌라드 대위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종종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 보면서 말한다. 그건 관객들로 하여금 윌라드 대위라는 인물과 동화되어 그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인데 하비 케이틀 같이 한 칼이수마 하는 넘한테 감정 이입을 할라믄 관객들이 얼마나 껄적지근 하겄냐?

그런 면에서 마틴 쉰을 기용한 것은 매우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보여지며, 마틴 쉰 역시 졸라 매력적인 캐릭터인 윌라드 대위역을 절대로 오바하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물론 그때까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왔던 마틴 쉰을 전격적으로 기용하여 그러한 내공을 뿜어 내도록 유도한 코폴라의 연출 공력에 새삼 똥꼬 저미는 감탄이 토해지게 된다만.

아무리 여러번 봐도 전율스러운 오픈닝 시퀀스을 지나서, 상부의 인가도 없이 이중간첩이라는 이유로 4명의 베트남인을 처형한 후 살인죄로 기소된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이 캄보디아 국경 근처로 잠적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벌이는 것에 위계질서의 위협을 느낀 군 당국으로부터 커츠 대령의 암살 지시를 받은 윌라드 대위가 수송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전개된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갖가지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보여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면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서핑을 하기 위해서, 바그너의 <발퀴레> 선율에 따라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헬기 공수 부대를 진두 지휘했던 킬고어 대령(로버트 듀발)이 나온 에피소드일 것이다.

발퀴레는 '전쟁에서 죽은 용맹한 전사들을 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나르는 전령'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니깐 거기서 <발퀴레>를 하늘이 떠나 가도록 틀어댄 건 음악이 웅장하고 멋쪄서만 그런 게 아녀. 죽더라도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으니깐 천국가게 해 달란 것이지. 그러면서 총들고 대항하는 넘이든 도망가는 넘이든, 아새끼든 아녀자든 닥치는 대로 쏴 죽여 버리는 악랄한 야비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숲 속에 숨어서 대항하는 베트콩 때문에 서핑을 할 수가 없다고 숲 전체를 네이팜탄으로 날려 버린 킬고어 대령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서핑조차 맘 놓고 즐길 수 없는 고약스런 것이고 이른 아침 네이팜탄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정적 속에서 퍼져 나오는 가솔린 냄새를 맡으면서 희열을 느끼며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시체 위에 자신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카드를 던져 놓다가도 부상당한 적에게 값싼 휴머니즘 쪼가리를 내던져 주는 위선과
기만을 몸소 실천한다.

"몸에 벌집을 내 놓고 반창고를 붙여 주려고 호들갑을 떤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위선이다... 역겨운 기만이다..."

코폴라는 그 역겨운 기만행위를 킬고어 대령의 서핑 보드를 훔쳐서 달아나는 윌라드 대위를 통해서 조롱한다. 서핑 보드를 다시 돌려 달라고 헬기를 타고 정글을 헤집고 다니며 애걸하는 킬고어 대령은 블랙 코메디의 냉소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킬고어 대령의 에피소드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광기와 위선을 표현했다면,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 새로이 추가된 장면 중에서 연료를 주고 바니걸들의 몸을 사는 에피소드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쟁이라는 조롱박에 갇혀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한심한 운명을 상징한다.

바니걸과 빠굴을 뜨기 전에 쉐프(프레드릭 포레스트)는 바니걸에게 가발을 씌우거나 가슴을 살짝 드러낸 채 포즈를 취하도록 하고 랜스(샘 버틈스)는 바니걸의 얼굴에 갖가지 화장을 하면서 빠굴을 곧 뜰 것 처럼 하면서 시간을 끈다. 졸라 똥꼬 근지러운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니걸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횡설수설 늘어놓는데 그 골자는 자기들도 몸 팔아 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전쟁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끌려들어 왔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의 한 가운데서 가발을 쓰고 위장을 하고 총을 들어 싸워야만 하는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서 추가된 에피소드 중에는 윌라드 대위 일행이 프랑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생필품을 조달하고 있는지 하는 의문점은 차치하고라도 프랑스인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프랑스인들의 자격지심이나 베트남전에 미국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끼어들었다는 것 등을 너무 설명적으로 드러내 버린다는 점에서 추가할 필요가 별로 없는 에피소드라고 생각된다.

다가 원래 그 에피소드에는 윌라드 대위와 록산느(오로 클레망)의 환상적인 빠굴씬이 있었지만, 프랑스 농가의 존재가 비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윌라드 대위의 실제했던 경험인지 몽환적인 상상이었는지 모호하게 두리뭉실 처리해 버리기 위해 빠굴을 막 뜨려는 순간 안개에 싸인 배 위에 앉아 있는 윌라드 대위의 모습으로 화면이 싹- 바뀌어 버린다. 졸~ 라, 아깝다. 그치?

이제 마침내 오프닝 시퀀스보다 딱 일곱배 정도 더 전율스러운 마지막 시퀀스에 당도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그치만 자기 자신도 오리무중인 영화를 니덜 모두의 명랑빠굴문화창달을 위한 잘난체용 정보로 환원시키느라 이박삼일 동안이나 두 손꾸락 높이 치켜 들고 자판을 뚜들기고 있는 나를 마저 따라와 주기 바란다.

아마도 커츠 대령과 같이 특이한 캐릭터는 영화사를 통 털어서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일 말론 브랜도라는 위대한 배우가 없었다면 커츠 대령이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강렬하게 특징지어졌을지도 의문이다. 3시간 15분의 러닝 타임 중에 30여분도 미처 등장하지 않는 말론 브랜도는 일순간에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해 버린다.

커츠 대령은 고대인들의 생활상와 종교적인 의식들을 기술한 제임스 조지 플레이저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를 옆에 두고 그러한 고대 의식에 따라 종교적인 교주처럼 군림하고 있다. 온갖 찌라시들은 커츠 대령이 명분없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밀림으로 잠적하여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커츠 대령의 행동에는 그렇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동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커츠 대령은 T. S. 엘리엇의 <공허한 인간(The Hollow Men)>을 읊조리며 사람의 목을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따 버리는 비정상적인 존재같이 보이지만, 내부 분열하는 자아의 정체성에 극심한 혼돈을 느끼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진리와 부조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편적인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윌라드 대위가 강을 거슬러 올라 커츠 대령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은 가장 보편적인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으로 접근해 가는 과정이며, 온갖 모순과 부조리로 둘러싸인 그 근원적인 심연은 뿌연 안개와 탁한 어둠에 싸여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다.

그 고통, 그 끔찍함, 그 공포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의 핵심에 접근할수록 점점 더 불확실해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핵심에 접근해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우리 스스로일 뿐이고 윌라드 대위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대변한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의 상황과 설정과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가 지금 하루 하루 전투를 치루듯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메타포이다. 그것이 22년과 베트남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의 가슴에 전율의 감동을 꽂아 버리는 이유이다.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는 흔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 가치가 새로워지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다. 걸작이란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남게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