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고모

백운수 2008. 4. 21. 02:20


시집간지 일주일만에 전쟁이 터지자, 여자의 남편은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전사 소식이 들려왔고, 눈물과 한숨이 채 그치지도 전에 시부모는 여자를 쫓아보내듯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청상에 과부살이로 늙느니 살아야 할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느냐고 달래서 보낸 것이지만, 진정으로 며느리를 위한 것인지 팔자 사나운 서방 잡아먹은 년이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여자를 친정의 어느 누구도 반겨 맞아 주지 않았고, 비난과 경멸의 냉담한 눈초리로 쏘아보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의 바깥출입조차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아닌 죄인이 된 여자가 불면의 밤을 지새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캄캄한 속에서 자신의 양손과 발이 결박당한 채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어딘가로 들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도한 곳에서 여자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형식적이나마 꾸며논 신방에서 소리지르지 않을 것을 재차 다짐받고 재갈을 푸는 남자를 보면서 이것이 그저 숙명이려니 체념하고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남자의 숙명도 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일제말 일본군에 끌려가 평생 다리를 절게되는 부상을 당하였고, 병약한 색시는 두 번의 사산을 경험한 후 결국 미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자를 새색시로 맞이한 남자는 죽은 색시의 친정으로 여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동네에서 남자는 고래심줄보다 질긴 사위였고, 장모는 새색시를 데리고 오는 남자를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해 주었습니다. 남자의 장모는 여자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로 그녀의 짐심어린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순간 여자는 이분은 내가 평생 모셔야 할 내 어머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자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내 고모가 되었습니다.

그 후 고모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할머니를 모셨고, 50여년간 2남 4녀의 맏이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였습니다. 30대 중반의 창창한 나이에 병명도 모르는 병에 걸려 대대적인 수술을 하였으나, 끝내 의사들에 의해 사망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내몰린 아버지를(당시에는 거의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병원에서도 송장치우기 싫다며 쫓아냈다고 하더군요. 물론 대부분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이었겠지만요.) 병원 근처 여관방에 누이고 어머니와 함께 한달여를 잠 한숨 제대로 못자고 간호한 고모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한 탓인지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소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겼던 고모는, 평생 농사일로 잔뼈가 굵어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철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성품이 온유하고 낙천적인 고모에게 평생에 단 하나 골치거리는 네 명의 딸 뒤에 얻은 외아들이었습니다. 20대 초반까지 무던히도 고모의 속을 끓이던 아들이 건설업에 뛰어들어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고 두 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제 몫을 다 하면서 한시름 놓았으나, 아들의 외도에서 시작된 가정불화가 해를 거듭할수록 도가 지나쳐가면서 고모의 주름살도 급격히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면서 고모부를 먼저 떠나보내고 십수년을, 살던 집과 정든 고향에서 자연과 농사를 벗삼아 홀로 남아있던 고모의 얼굴은, 세월과 함께 찾아온 노쇠와 아들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비롯된 속앓이가 겹쳐서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병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내가 장가가는 것만 보고 죽으면 더이상 원이 없겠다던 고모에게 결혼을 앞둔 명절에 지금의 아내를 데리고 찾아 갔을때, 고모는 따뜻한 미소와 푸근한 가슴으로 나와 아내를 맞아주었습니다만, 고모의 눈가에 비치는 짙은 그림자와 기어나오듯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가 내 가슴을 안타까움에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내 결혼식에는 참석하겠다던 고모를 결혼식때 보지 못하고, 점점 더 잦아지는 고모의 병원 왕래 소식을 들으면서 때가 멀지 않았음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세상의 모든 아픔이 그렇듯이 고모의 부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형, 고모.. 돌아가셨대.."
무슨일 때문이었는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핸드폰 너머 동생의 목소리는 아득하게 들려왔습니다. 동생과 언제 어떻게 고모댁으로 내려갈 것인지를 상의한 후, 통화를 끝내고 나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고모의 부음을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슬픔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친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나에게 고모는 친할머니 같은 존재였고, 고모와 우리 집안의 특별한 인연으로 인해 고모에 대한 마음이 더욱 애틋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나를 아내는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장을 치른 후, 고모의 집 뒷산 고모부 옆에 마련된 장지에 도착하여 상여를 메고 고모의 가시는 길을 도왔습니다. 관을 내려놓고 흙을 덮어 봉분을 쌓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드실 음식을 올리는 중에 고모의 소지품들을 태웠습니다. 햇살은 따사로왔지만, 잠이 부족해서였는지, 아직 서늘한 아침 공기에 한기를 느꼈기 때문인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가까이 다가가 불타 사라지는 속세의 미련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전세기간이 끝나가면서 집주인은 전세금을 3천만원씩이나 올리겠다고 합니다. 내가 사는 곳에도 뉴타운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어서 처음 이곳에 올 때 융자 좀 얻어서 좀 작더라도 집을 샀으면 지금쯤엔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을텐데, 신혼이라고 일단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심에 자기가 철이 없었노라고 아내는 푸념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투자가치가 있는 집을 보러 다니는게 일이 되었습니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구역 안에는 이미 오를만큼 올랐지만, 지금 사더라도 충분히 투자가치가 있다는 말도 있고 뉴타운 인접지역이 더 투자가치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인접지역 역시 뉴타운 구역과 비교하여 결코 만만치 않게 집값이 뛰어서 오를만큼 올랐으니 차라리 좀 더 외곽으로 가는 게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내는 어쨌든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이렇게 가다가는 평생 집한칸 장만하지 못하고 이사만 다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야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집이란 거처하기 편하고 쉬고 잠자는 곳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두배 가까이 뛰어오르는 집값 때문에 집을 사고 거기에서 이윤을 취해 더 좋은 집을 구하려는 이유에서 집을 사려한다는 내가 마땅찮아 보입니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는 김규항의 말에 따른다면 나는, 내 양심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도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다는 스스로의 힐난에 쫓겨 나는 결국 이 근처 어딘가 투자가치가 아주 좋다고 침을 튀기는 부동산업자의 꾀임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씩 고모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잔불에 흙을 덮어 불을 끄고, 사촌들 몇몇과 함께 주변정리를 하고 고모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귀경길이 번잡해지기 전에 고모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