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지갑

백운수 2008. 3. 14. 00:47

입춘이라지만 동장군의 시퍼런 서슬은 옷깃을 여미고 몸을 웅크리게 한다. 늦은밤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고, 어찌하다 보니 저녁을 걸러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 쥐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따분함과 굶주림을 잊기 위해 책을 들여다 본다.

 

몇 개의 역을 지나는 동안 엉덩이 밑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에 나른한 졸음을 느끼면서도 흐리멍텅해진 시선은 책에 두고 있을 무렵, 책을 든 팔을 가만히 건드리는 사람의 손이 눈에 띈다.

 

"지갑 떨어뜨리셨는데요."

 

사람좋아 보이는 중년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지갑을 받아든다.

 

"제 지갑이 아닌데요... 아까 앉아있던 분이 떨어뜨리셨나 봐요."

 

기왕에 받아 든 지갑을 중년남자에게 다시 돌려주기도 뭐해서 지갑을 주머니에 넣는다.

 

"나중에 찾아줘야겠네요."

"그래야겠죠."

 

중년남자의 미소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책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갑을 꺼내 뒤적여 본다. 학생증과 몇 개의 마일리지 카드,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는 지갑에 마침 당사자의 연락처도 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아무개씨죠? 아까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인데요. 지갑을 떨어뜨리셨네요. 지금 여기가..."

 

마침 정차해 있는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회현역인데, 여기서 기다릴테니 오셔서 전화하실래요? 발신자 번호 찍히죠?"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역사 의자에 앉아 열차가 들어올 때마나 휘몰아치는 바람과 냉랭한 의자의 한기를 엉덩이로 느끼면서 지갑의 주인을 기다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이고, 배고파라. 내일 찾아 줄 걸 그랬나?... 걍 우체통 같은 데 넣어 버려도 됐을 텐데... 춥긴 왜 이렇게 추운 거야?...'

 

다음날 지갑을 전해 주려면 어찌됐든 그로써는 원치 않았던 많은 시간을 들여 지갑있는 곳까지 그가 와야만 하고, 우체통 같은 데 넣어 버린다면 그 지갑이 그에게 당도하는 시간이 경험상 한 달 이상이 걸리리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바로 찾아 주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의 불편함과 귀찮음과 배고픔에 슬며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면서 지갑을 찾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외관의 그럴듯함에 비해 그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는 갈등은 우스꽝스럽게 뛰뚱거린다. 열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 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이 있다.

 

손짓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그가 다가오자 지갑을 건네준다. 지갑을 받아 든 그는 내용물을 잠깐 확인하고는 멋쩍게 미소를 짓는다.

 

"마침 연락처가 안에 있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 근데, 제가 돈도 없구..."

 

고마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보자 방금전까지 충돌하고 있던 우스꽝스런 갈등이 새삼 부끄러워 얼굴까지 붉어진다.

 

"괜찮아요... 차 왔는데, 어서 가 보세요."

 

여러차례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그는 되집어 가야 할 열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