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Q84> - 먹을 게 없는 소문난 잔치

백운수 2011. 9. 30. 03:37

 

상다리가 휘어지게 내어 온 음식은 푸짐하고 풍성했다. 군침을 돌게 하는 냄새는 저절로 의자를 당겨 앉게 했다. 어떤 것부터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을 하면서 수저를 들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음식마다 뭔가가 빠져 있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말 맛있다고 먹을 수는 없는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너무나 맛있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10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생전 처음 먹는 진수성찬이라면서 칭찬을 늘어놓지만, 나는 도통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먹을 게 없는 소문난 잔치인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나에게는 그 ‘소문난 잔치’였다. 물론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전3권 2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끝까지 탄탄하게 엮어내는 이야기의 힘은 놀라웠다. 아오마메와 덴고, 3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우시카와의 캐릭터는 생생하면서도 밀도 높게 그려졌으며, 캐릭터 각자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다음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편집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지를 남겨 두는 솜씨는 감탄할 만 하였다. 일찍이 하루키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성공적으로 발휘하였던 그 솜씨다. 하루키는 이 작품을 쓰면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구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지만, 거창하게 바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구성은 치밀하였다.


거기에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케 하는 <1Q84>라는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암시하였다시피 빅브라더와 유사한 리틀 피플이 등장하고 소설 속 소설인 ‘공기번데기’와 ‘고양이 마을’을 통해서 이야기는 더 풍성해진다. 문장은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게 유려하고 또박또박 쓰여진 단어들은 더할 수 없이 빛난다. 곁가지로 등장하지만 체호프와 길랴크인, 칼 융은 소설 속의 은유로 훌륭하게 작용한다. 그다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도, 그다지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도, 그다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벌어지지도 않는 2000여 페이지 중에서 들어냈으면 하는 대목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도 놀랍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되면, 허탈해진다. 진수성찬의 음식을 맛보고 있는데 뭔가가 빠진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싱겁지도 너무 짜지도 않고 갖은 양념의 맛이 느껴지는데 군침이 도는 맛은 아닌 그런 기분이다. 빅브라더를 모방한 것에 불과한 리틀 피플의 존재감과 그들이 만드는 공기번데기가 소설 속에서 전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따로 노는 점이 불만스럽고, 아오마메가 대머리 중년에게만 성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길고도 강한 팔을 지녀서 어디라도 뻗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무색케 하는 조직 ‘선구’의 어이없을 만큼 무기력한 모습에 실소가 나오고, 한없이 늘어진 덴고의 간병 부문은 3분의 1 정도로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지만, 그것은 진수성찬에 대한 공연한 트집일 수도 있다.

<1Q84>는 많은 이야기와 은유와 상징을 담고 있지만,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가 어린 시절 겪었던 상실의 트라우마를 사랑의 힘으로 치유하고 극복해 가는 과정을 2000여 페이지에 걸쳐서 길고도 지루하게 나열한 것뿐이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이 장만되었고 먹음직스럽게 내 놓아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하루키 자신이 <상실의 시대>에서 하지 않았던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토록이나 풍성하게 음식을 장만해야 했단 말인가? 그 이야기를 또 한다고 해서 감옥에 간다거나 체포가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1984>를 연상할 제목을 달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현실의 고통이 묘파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비록 지금 다시 읽게 된다면 처음 접했을 당시의 감흥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훌륭한 작품이고, <1Q84> 역시 문학적으로 분명 훌륭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신자유주의 마지막 발악이 광포하게 세계를 뒤덮고 있으며 끊임없이 탄압받고 있는 인간 정신의 절대 자유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지금의 ‘1984’를 <1Q84>는 진수성찬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양념으로만 사용하였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