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연민정은 어떻게 다른가?
한참 방영할 때는 본방 사수하지 않던 아내가 며칠에 걸쳐 <왔다! 장보리>를 다시보기로 1회부터 마지막까지 틈날 때마다 시청하는 통에 나 역시 <왔다! 장보리>를 군데군데 보게 되었다. 그동안 원체 화제가 되었던 연속극이었기에 뉴스를 통해서,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즐겨 보시던 프로그램이었기에 주말 가족 모임에서 잠깐씩 어머니와 함께 시청한 기억을 통해서 대략적인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건너뛰면서 보게 되니 아내에게 중간의 내용을 물어가면서까지 <왔다! 장보리>를 시청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이 연속극의 성공 요인은 연민정이라는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연민정의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나 한없이 선량해서 한없이 고통받는 장보리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연민정에게 반드시 정의의 심판이 내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나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연민정의 욕망 자체를 비난하거나 그것에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민정의 욕망은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순한 것일 수 있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것, 더불어 성공하고 싶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연민정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은 그 욕망 보다는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연민정이 저지르는 소시오패스적인 만행에 분노하는 것이리라.
부모와 자식과,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매나 마찬가지일 수 있는 사람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그들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고, 사랑이나 우정,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심성을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자신의 편의대로 활용하고, 그 모든 행위에 단 한 치의 죄의식이라든가 책임감을 가지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유체이탈의 최극단을 보여주는 연민정에게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 연민정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자신으로 인해 발생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은 오로지 다른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며, 설혹 그 희생과 고통이 일부 있다 하더라도 모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한 자신의 충정에 의한 것이므로 그러한 희생이나 고통은 감내해야 할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연민정의 모습은 쥐와 닭의 계보로 이어진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성향이지 않은가!
연속극은 특성상 언젠가는 끝을 맺어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는 달리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선악의 구도에서는 권선징악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무리 작가가 열린 구도를 채택하고 싶어도 연민정 같은 인물이 호의호식하며 살고 장보리는 끝내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 연속극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장보리>와 같은 연속극에 심취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러한 대리만족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정의의 심판이 내려지는 모습과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선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가상에서나마 보고 싶은 것이다. 불행한 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의 책임이 결국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연민정이 계획한 악행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연민정 혼자만의 욕망과 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연민정의 주변에서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다가 연민정에게 약점을 잡힌 사람들, 혹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민정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연민정의 악행을 실행 가능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비난을 퍼붓지만, 가만히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각자 나름의 고민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음을 알게 되어 때로는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각자 나름의 고민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오늘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악행에 침묵하는 한 현실의 연민정이 정의의 심판을 받거나 최소한 현실의 장보리만이라도 행복해지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독재자의 딸이 부정 선거로 당선된 나라,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할 기관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는 나라, 공영 방송의 기자들이 국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나라, 그럼에도 시청료를 올리지 않아서 공영 방송이 위기라고 국민을 협박하는 나라, 전과 14범이 대통령이었는데 재임 기간 내내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던 그의 가훈이 정직이라는 나라,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면서도 무상 보육과 무상 급식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나라, 재계 순위 1위인 기업이 노조가 없는 나라, 친일파라면 쌍심지를 켜고 공분하면서도 친일파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는 나라, 300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왜 그렇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가를 명백하게 밝히자는 피해자 가족들의 가장 최소한의 요구 조차 묵살되는 나라, 이런 나라가 가능해지는 것이 과연 몇몇의 연민정 때문일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이 총체적인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암담해 보이지만, 의외로 방법은 간단할 수 있다. 결코 악행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무엇이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래서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연민정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다음 회차 연속극을 기다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