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L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전화박스 주변을 둘러 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는 어딘가? 내 눈에 비친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나는....
두렵습니다.
"죽음이 삶의 대극으로써가 아니라 그 일부로써 존재해 있"기 때문인지, 혹은 "언제나 어딘가가 깨져 있고, 그리고 다만 갈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내가 이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더구나 나는 "심각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어슴프레하게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삶이 이토록 복잡하고 어려운 건 단지 내가 삶이 이토록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합니다. 그럴때면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짓습니다.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무언가 다른 것이 나를 또 힘겹게 하겠지만, 뭐, 어차피 마찬가지겠지, 인생이란... 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두렵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보다, 내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보다, 내가 살았었다는 사실, 이토록 막연하고 무감각하게 살아왔었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결국 그것은 나의 미래가 까마득한 벼랑 위를 올려다 보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혼돈과 절망으로 인지되어 끝도 모를 나락의 한 중간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따위 관념적인 혼란보다도 더욱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 같아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마침내 그를 미워하게 되는 내가 두렵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두렵고, 상처 받은 이의 가슴에 흉한 발톱자국을 거리낌없이 남기는 내가 두렵고, 그리고 마침내 끊임없이 축적되는 알 수 없는 권태가 나의 모든 신경과 감각을 마비시켜 그러한 두려움조차 깨닫지 못하는 내가 두렵습니다.
나는 항상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편견과 오만이 만들어 낸 궤변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사물은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선악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겐 최소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와 엇비슷하게 생겨 먹은 동류의 인간과 함께 존재해 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정이나 신뢰, 사랑 같은 것 말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는 그 예의를 대부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의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켜가고 있습니다. 아니, 지켜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믿음이 점차로 깨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또한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철저히 분쇄되어 단 한조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전율시킵니다. 철저히 소멸된 그러한 예의가 언제 존재하기라도 했었냐는 듯이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광포한 섬뜩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무라까미 하루끼가 <상실의 시대>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너저분한 이 편지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from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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