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메밀소바

일상2009. 8. 14. 19:08

점심을 먹으려고 들른 식당에서 메밀소바를 주문해 놓고 멀뚱하니 앉아 있다. 한참 쏟아붓던 비가 멈추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려는지 어디선가 매미가 큰 소리를 내며 울고 있다. 조바심치며 허둥지둥 오전을 보냈지만, 어떠한 생산적인 결과에도 그 결과에 이를만한 일말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한 채 때가 되어 끼니를 때우려 식당 의자에 앉아 메밀소바를 기다리며 멍청한 시선을 부정확한 어딘가에 보내고 있다.

멍청한 시선을 받은 부정확한 어딘가는 출입문이었는데, 딸랑이는 소리를 내며 출입문이 열리고 남루한 옷차림을 한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슬그머니 들어온다. 20년은 족히 된 듯한 빨간색 츄리닝 바지를 입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반팔티를 입었는데, 자세히 보니 반팔티 안에 반팔티를 하나 더 입고 있다. 오래도록 깎지 않은 수염과 멀리서도 술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발그레한 얼굴을 한 그 남자는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 와 식당 안을 둘러보고 있다.

마침 빈자리가 없던 식당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자리는 멍청한 시선을 부정확한 어딘가에 보내며 멀뚱하니 앉아 있던 사내의 앞자리뿐이다. 그 사내는 고개를 돌려 바삐 움직이는 종업원들을 바라보다가 혹여 다른 빈자리가 없는지 식당을 둘러본다. 그러나 빨간색 츄리닝 바지의 남자는 사내의 앞자리에 이르러 아무런 양해의 구함도 없이 슬그머니 앉아 버린다.

종업원이 그 남자에게 물컵과 함께 메뉴판을 가져다주자, 메뉴판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는 남자의 모습을 사내는 힐끔거리며 바라본다. 길게 자란 손톱은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고 넘어져서 긁힌 듯한 상처로 보이는 빨간색 자국이 이마에서 왼쪽뺨 위까지 길게 그어져 있다.

마침내 무언가를 정한 듯 남자는 고개를 들어 종업원을 바라보았고, 주문하시겠느냐는 종업원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메뉴판의 어딘가를 가리킨다. 남자가 가리킨 것은 즉석떡볶이를 주문하면서 첨가하는 우동사리였다. 종업원이 우동사리만은 주문할 수 없다고 하자, 남자는 라면사리를 달라고 한다.

종업원은 사리는 떡볶이를 주문해야만 같이 주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남자는 그렇다면 천원짜리 음식은 없냐고 묻는다. 천원짜리 음식은 없다는 종업원의 말에 남자는 다시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그러는 동안 힐끔거리며 남자를 보던 사내에게 주문한 메밀소바가 내어져 온다.

사내는 남자에게 애써 무관심한 듯 시선을 떨구고 메밀소바를 먹기 시작한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는 사내에게 그건 얼마냐고 묻는다. 사내가 4천원이라고 답하자 남자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쉬며 다시 메뉴판 탐색을 시작한다.

문득 사내는 자신이 계산할 터이니 메밀소바를 드시고 싶다면 드시라고 남자에게 권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누구를 동정하는 것이냐는 카랑한 외침이 사내의 귓가를 때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내는 남자와 동석하는 것 자체도 꺼려했으면서 새삼스레 무슨 동정이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게다가 그 남자가 과연 사내의 값싼 동정을 기분나빠하지 않을지도 의문이다.

사내는 다시 고개를 박고 메밀소바를 후룩거리며 먹는다. 남자는 결국 종업원에게 김밥을 주문하였고, 종업원은 2천3백원 선불이라고 한다. 이 식당은 원래가 선불제로 운영되고 있다. 남자는 빨간색 츄리닝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 5천원짜리 지폐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메밀소바를 먹는 데 열중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내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힐끔거리다가 근처에 5천원짜리 메밀소바 전문점에 가지 않고 이 식당에 들러 4천원짜리 메밀소바를 주문한 자신을 생각해 낸다. 가벼운 냉소가 사내의 입가에 스민다.
삶이란 이다지도 버거운 것이라는 자조의 냉소...

사내가 메밀소바를 다 먹고 일어설 즈음에 남자에게 2천3백원짜리 김밥이 내어져 온다. 남자는 김밥 위에 고춧가루를 뿌리기 시작한다. 그냥 살짝 덧입혀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김밥이 빨간색 고춧가루에 거의 가려질 정도로 수북이 뿌리고 있다. 사내는 남자가 그 김밥을 먹는지 어떤지는 보지 않고 식당문을 나선다.

갖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사내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지만, 이내 걸려오는 전화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에 묻혀 생각들은 다시 미세한 파편이 되어 사라져 간다.
무덥고 찌는 듯한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림동 고시촌에서 있었던 일  (0) 2010.11.09
지옥철 묵시록  (0) 2010.11.06
위문편지와 민방위교육  (0) 2010.11.06
열병을 치유하는 예수  (0) 2010.11.02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날씨 흐림  (0) 2010.11.02
그대, 행복한가  (0) 2009.05.28
고모  (0) 2008.04.21
그림자  (0) 2008.03.29
때로는...  (0) 2008.03.16
태안에 다녀왔습니다.  (0) 2008.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