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당신엔 캐감동었었지..

지금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연말만 되면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위문편지를 보내는 행사에 고등학교 때까지 동원되었었다. 내 또래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 싶은데, 초등학교 때 나는 북한군은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고 김일성은 엄청나게 덩치가 큰 돼지의 형상으로 묘사된 <똘이장군>이라는 애니메이션에 감동을 먹었고 실제로도 북한괴로도당과 김일성의 무시무시한 마수가 언제 어느때라도 우리에게 뻗쳐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약했던(-,.-;) 나는 <똘이장군>에 등장한 늑대 형상의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허겁지겁 도망다니는 꿈까지 꿀 지경이었다. 그래서 국군 장병 아저씨께 보내는 위문편지에서 나는, 언제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생하시는 아저씨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는 요지의 내용을 쓰면서 똥말똥말한 눈을 빤딱이며 스스로에게 뿌듯해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곧, 내가 너무나도 편협한 파시즘에 세뇌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은 국군 장병 아저씨께 보내는 위문편지에 너도 나도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회의하게 하였다. 물론 기본적으로 나는 국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것이 전혀 쓸모가 없다거나 위문 편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왜 위문 편지를 매년 연말만 되면 일체의 예외도 없이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말에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된 위문편지에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점을 기술하였고, 이러한 위문 편지에서 과연 국군 장병 아저씨는 얼마나 '위문'을 받는지 궁금하다는 요지의 내용을 쓰게 되었다. 위문편지를 보낸 다음날, 종례가 끝난 후 담생이 내 이름을 호명하면서 귀가하기 전에 교무실에 잠깐 들를 것을 명령하였다. 

--재연한 실제 상황--

담생 : ...이상 종례를 마친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보며) 백운수!
나 : (화들짝 놀라며) 에... 예?
담생 : (단호하고 강경하며 냉정하게) 따라 왓!
나 : --;;;;;;;;;;;
(주위에 있던 반 친구들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고등학교 1학년때의 담생은 일명 PS(사이코 새디스트)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는데, 여름과 겨울방학 기간을 제외하고 1년 내내 허벅지에 멍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을 정도로 우리반 전체에게 현란한 빳따를 휘둘러댔기에 될 수 있는 한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최선책이었다.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어서 부언하자면, 담생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바로 잡고자 빳따를 휘두르게 되면 엎드려 뻗쳐 자세에서 허벅지 부분을 기다란 대걸레 자루로 두 대씩 때리게 되는데, 일단 맞으면 멍자국이 퍼렇게 생겨나고 그 멍자국은 최소한 일주일 이상 지속되며,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담생의 예리한 지도 편달 레이다에 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담생의 빳따 휘두르기는 대부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간혹 담생의 애정지심을 너무나도 심각하게 촉발시킨 사람은 따로 담생에게 불리어져 가서 어떠한 사랑을 받는지 전설로만 전해지는 탓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다음날 도저히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없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등교한 그 사람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담생에게 호명되어 교무실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주위의
친구들은 '넌 이제 조뙜다.'라는 즉각적인 부러움의 시선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 몬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나는 조뙌 것이다. 담생의 철철 넘쳐나는 사랑이 나에게 쏟아질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위문편지조차 검열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죽지 두번 죽을까? 미지의 공포에 똥꼬를 움찔거리면서도, 아무리 잔머릴 굴려 봐도 그닥 잘못한 게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르자 짐짓 당당한 척 교무실로 들어서서 담생의 앞에 마주 섰다.

담생은 그 전날 내가 써서 제출한 위문편지를 손에 들고는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와 같이 눈을 번득였다. 나는 위문 편지가 검열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첨 알았다. 당시에 내가 담생에게 받은 사랑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상상에 맡기겠다.

어제 민방위 교육을 받았다.
8년간의 예비군 훈련이 끝나면 봄과 가을 각 4시간씩 4년 동안 받아야 하는 이 민방위 교육을 받으면서 위문 편지와 같은 획일적이며 그다지 능률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은 행사가 생각났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도 나는 항상 그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아무 쓸모도 없이 낭비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예비군 훈련에 동원되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향방 훈련이라고 불리는 것은 저녁에 동네 초등학교 같은 곳에 모여서 노리쇠도 후퇴되지 않는 총이 수두룩한 총을 지급받고는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데, 그런 훈련을 통해서 군인 정신이 함양되리라 생각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공연히 동네 사람들에게 위화감이나 조성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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