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지옥철 묵시록

일상2010. 11. 6. 02:24

2001년 8월 23일 목요일

THIS IS THE END
BEAUTIFUL FRIEND
THIS IS THE END
MY ONLY FRIEND, THE END


또 잠을 설쳤다.

종일 더위에 지친 채 수면 부족으로 허덕이다가도 막상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 활개를 치던 그 많은 잠귀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 두어시간을 뒤치락거리면서 오지 않는 잠을 불러 내는 것도 못할 짓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겨우 잠에 빠져 들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아침은 악귀같이 내 뺨을 후려치고 햇살은 똥꼬를 찔러댄다. 가사상태에서 출근을 하고 그렇게 또 하루는 시작된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터
모으기 시작한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오늘도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거의 습관에 가까와져 버렸다. 그 자료들 중 90% 이상은 중복된 것이고, 그 중에서 또 90% 이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뿐이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집요하게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지 불분명해져 버렸다.
처음 자료들을 모으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 대해서 뭔가를 끄적여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꼭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지도 않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지옥의 묵시록>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이 기회에 규명해
보기 위해서? 가슴 떨리게 고대하고 있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 관람이 좀 더 흥미진진해지게 하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처럼 집요하게 하는 것일까?

날씨는 여전히 찌는 듯이 덥다.
지하철 냉방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코를 간지럽힐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면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열기는 지하철 천장에서 뿜어주는 냉기를 가볍게 제압해 버린다.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지
않나 싶다),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의 고충을 적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감옥에서의 겨울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춥고 고달프지만, 그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건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온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여름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훌쩍 뛰어 넘도록 무덥고
고통스러운데, 특히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 나는 열기는 그 고통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릴 때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참을 수 없는 열기는 증오를 뛰어 넘어 곧장 살의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꼼짝도 할 수 없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디에도 시선둘 곳 없는 지옥철 안에 갇혀 있는 내 바로 앞에서 엄청난 열기를 뿜어대는 사람이 지독한 몸냄새까지 동반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느낀다.
살의... 말이다.


2001년 8월 24일 금요일

LOST IN A ROMAN...WILDERNESS OF PAIN
AND ALL THE CHILDREN ARE INSANE
ALL THE CHILDREN ARE INSANE
WAITING FOR THE SUMMER RAIN, YEAH

하나씩 접근해 가기로 하자.

묵시록(The Apocalypse)이란 여러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비인간적 세계의 사건들을 묘사한 문학이라고 한다. <바룩 묵시록> <제4 에즈라서> <요한 계시록>이 1세기 말의 3대 묵시록으로 일컬어지는데 묵시록이 계시록(The Revelation)과 동의어로 쓰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묵시록의 내용은 주로 예언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마겟돈이니 예수 재림이니 최후의 심판 등을
예언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을 <요한 묵시록>이라고도 한다. 요컨대 묵시록이란 그리스도계의 계시 문학서인 셈이다. 그런데 언어의 미묘한 질감적 차이에 의해서 계시록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세계관이 느껴지는 반면, 묵시록이라고 하면 다분히 부정적인 세계관이 느껴진다.

<Apocalypse Now>를 직역하면 '현대 묵시록' 정도 될 것이다.
영어의 The Apocalypse와 The Revelation의 어감적인 느낌의 차이 역시 우리의 묵시록과 계시록의 차이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코폴라가 '현대 계시록'이 아닌 '현대 묵시록'으로 타이틀을 정한 것은 침울하고 몽환적인 화면과 염세적이고 비판적인 메세지가 묵시록이라는 단어의 질감과(최소한 우리의 언어적 질감과는) 잘 어우러져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나라에 개봉하면서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한 건,
'지옥'이라는 막강한 단어를 동원해서 묵시록을 더욱 장중하고 비장미 넘치게 만들긴 했지만, 영화의 배경인 베트남 전쟁이라는 '지옥'의 묵시록으로 의미가 축소된 감이 없지 않다. '현대 묵시록'이라는 원제가 내포하는 것은 그 묵시록의 배경이 베트남 전쟁으로 은유되는 현대 사회 전체이며, 전쟁을 통한 인간의 광기는 현대 사회에서 전쟁하듯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광기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옥의 묵시록>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의(지금이라고 해서 별반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 생각없는 번역이 타이틀을 바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비디오로 출시되어 있는 두 편짜리 <지옥의 묵시록>을 보면, 그때의 번역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알 수 있다. Kilgore를 '킬고'로 Clean을 '클랜'으로 표기한 건 양반이고, Wagner를 '와그너'라고 해 놓았으니 좀 더 심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대사를 어떻게 번역했을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날씨는 여전히 찌는 듯이 덥다.
그리고 지하철은 여전히 짜증스럽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은 생활이라는 전쟁에 쫓겨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외양을 하고 있었고 자리에 앉아마자 졸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치일 만큼는 아니었지만,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면 난해한 몸 비틀기와 사팔뜨기를 해야만 가능할 정도이기에 지하철 안은 예의 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역에 정차하고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또 사람들이 올라 탄다.
갑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물결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내 건너편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앞에 성큼 나타나셨다. 얼른 자리를 차고 일어나려는 찰나 내 건너편 옆에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엉거주춤 나는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상당히 빠른 반응이었지만 자리를 양보해 주려는 사람이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 할아버지는 '에헴-' 큰기침을 한 번 하신다. 얼굴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하시다. 약주도 한 잔 하신 듯한 얼굴이다.

자리에 앉으신 할아버지는 불그스름한 얼굴을 두리번 거리시더니 바로 옆에서 졸고
있는 그 샐러리맨을 바라보면서 불쾌해 하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신다. 몸을 약간 삐딱하니 하고 앉아서 연신 헛기침을 해 대는 것이 왜 젊은 것이 노약자석에 앉아서 졸고 있냐는 질책이다.

그래도 지독한 피로에 지쳐 있는지 그 샐러리맨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사방을 휘~ 휘~ 둘러 보시던 할아버지는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헤치고서는 출입문 앞에 서 있는 또다른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고 오시려 한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노인 공경할 줄도 모른다는 요지의 고함을 고래 고래 질러대신다.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눈을 뜬 샐러리맨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할아버지의
역정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온 다른 할아버지가 한사코 그 샐러리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아 그 샐러리맨은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는다.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는 다음 역에서 내리기 위해 출입문 앞에까지 가 있다가 이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오신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바라 보면서 나는 문득 JP가 생각이 난다.
오장섭 건교부 장관이 짤리면 결코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혹자는 이를 '몽니'라는 천박한 용어로 부르더라만)를 내 보이던 그. 그러나 밀려드는 비난 여론를 감당하기 어려워 오장섭 건교부 장관이 경질되고, 건교부와 관련된 전문성에서는 토지공사 사장으로 재직했던 1년 6개월이나 되는 유사경력이 전부이고, JP의 최측근이라는 거 빼고도 도덕성에 있어서 흠잡힐 만한 거 투성이인 김용채 토지공사 사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자 희희락락해 하던 그.

8.15 민족통일대축전의 방북단 사건으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도마 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DJ가 임장관을 싸고 돌지 말아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자민련의 수장인 JP.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기득권은 절대로 보호받아야 하고 타인의 실수는 절대로 성토되어져야만 한다는 이 땅의 모든 수구 권력들이 오버랩된다.


2001년 8월 28일 화요일

IT HURTS TO SET YOU FREE
BUT YOU'LL NEVER FOLLOW ME
THE END OF LAUGHTER AND SOFT LIES
THE END OF NIGHTS WE TRRIED TO DIE

THIS IS THE END

마침내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했다. 전날 두어시간만 자고 아침부터 종일 운전하면서 돌아다닌 탓에 몸은 납처럼 무겁고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였지만, 주저 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세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자니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루드비코 요법'이라는 세뇌 교육을 받았던 알렉스가 떠올랐다.

물론 자발성의 상이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혹시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결국 내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국한시켜 놓은 채 이미 정해져 있는 완고한 결론으로 모든 것을 아전인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올바른 영화보기의 자세에 있어서, 다른 모든 예술 작품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예술도 그것이 창작자의 의도 그대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는 없으며 대중은 각각의 개인적 경험과 환경에 의해서 똑같은 예술 작품에서 전혀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술에 탐닉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비록 내가 자신의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서 <지옥의 묵시록>을 신성화하였고,
그것이 내 인생의 일정 부분에 지울 수 없는 무게를 달아 맸다고 해서 삭제된 분량이 복원되고 새로이 편집되어 '돌아온' <지옥의 묵시록> 마저도 똑같은 결론으로 인식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기 이전에 이미 어떠한 결론, '가슴 떨리게 고대하는 감동'에 이르도록 스스로를 집요하게 잡아 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픈닝 시퀀스는 전율스러웠다.
아마도 도어즈의 <The end>가 아니었다면 오픈닝 시퀀스가 그토록이나 강렬하게 각인될 수 있었을까마는 윌라드 대위 역의 마틴 쉰은 인간의 본질적 고독 속에서 드러나는 극렬한 광기를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해냈다.

........

아무래도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블랙키 로울리스라는 걸출한 뮤지션이 이끄는 밴드 W.A.S.P.는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시퀀스에서 영감을 얻어 앨범 <K.F.D.>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 앨범을 설명하는 자료에는 커츠 대령이 읊조리며 독백하듯 윌라드 대위에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 부분에서 T.S. 엘리엇의 <The hollow men>의 일부가 인용되었다고 한다.
엘이엇이었나? 쉴러가 아니고?

T.S. 엘리엇의 <The hollow men>을 찾아서 읽어 보았고,
<지옥의 묵시록>의 영문 시나리오를 훑어 보았지만 밋밋한 영어 실력 탓인지, 죤 밀리어스 원작 시나리오가 영화 <지옥의 묵시록>과 상당한 부분에서 전혀 다른 탓인지, 엘리엇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미로를 헤매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 시퀀스에서 소가 도살되는 장면과 커츠 대령이 살해 당하는 장면의 교차 편집이 의미하는 바가 소의 순종적이며 비극적이고 희생적인 운명과 커츠 대령의 운명의 유사성을 상징한다는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아마도 그것은 운명이라는 굴레, 헤어나올 수 없는 그 공포를 스스로는 종결 짓지 
못하는 운명의 유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가 도살되는 제식은 열반으로 향한 향연이지 않았을까?
거의 3주째 지옥이라는 단어와 묵시록이라는 단어의 중간 쯤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내 정신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 종결짓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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