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스트로브와 숙명

2002년 2월 22일 오전 1시 26분 15초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스트로브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에게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이 녀석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여 한심하고 세속적인 싸구려 그림을, 예술이라는 건 몸을 치장하는 모피 코트나 거실을 우아하게 도배해 주는 장식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얼간이들에게 고가에 팔아넘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의 표현대로라면 "고뇌와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이 희극적일 수밖에는 없는 외양을 지녔기에 비극적인" 이 녀석에게 살리에르와 같은 예술적 안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의 진짜 비극은 시작된다.

그에게 만일 그러한 안목이 없었다면, 죽어가는 챨즈 스트릭랜드를 살려 주고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작업실로 내주고 자신의 부인을 스트릭랜드에게 빼앗기고, 마침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서는 스트릭랜드와 자기 부인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다가 사랑하는 부인의 자살과 오직 자신 밖에는 알아 볼 수 없는 스트릭랜드의 걸작 앞에서 "희극적일 수밖에는 없는 외양을 지녔기에 비극적인" 모습으로 "고뇌와 절망으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숙명이 그렇듯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녕 그런가?
정녕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어쩔 수 없음"에 무기력하게 굴복당하고 말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아무래도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야 말 것 같다. 패배론적 숙명론자에게 들리는 음악은 Aphrodite's Child의 <Don't try to catch a river>. 그래도 유일한 위안은 음악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불면의 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Axel Rudi Pell과 Royal Hunt, Rainbow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늘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허기가 밀려와서 꾸역꾸역 허기를 메워야 하고, 똥오줌을 싸야 한다. 존재해야 할 실존적인 이유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던 존재에게 존재해야 할 아무런 실제적인 이유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존재를 강요당하는 현실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모든 숙명이 그러하듯이,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정녕... 그런가?


잠, 환상, 두통


2002년 2월 25일 오후 8시 49분 10초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밥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술담배로 몸을 혹사시켰으니 병이 나는 건 당연하다.
종일 신열에 들떠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담배를 피우면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 연기가 고역스럽고 아무런 맛도 느끼질 못하면서 두통에 시달리는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온갖 생각들에게 니코틴 한 조각은 작은 위안이 된다.

저녁나절쯤에야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나 거울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눈은 한 자쯤 들어가 있고 얼굴 여기저기에 뻘건 반점 같은 것이 돋아나 있으며 일주일을 깎지 않은 수염은 몰골을 더욱 흉측하게 한다.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밥을 먹고 약을 먹는다.
약기운에 취해 다시 잠을 청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던 정신은 이내 무한한 시공 속에 내팽개쳐져서 한없는 빛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렇게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간구했건만, 다시 눈을 뜨니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계속 더 아프기로 작정한다. 지금의 나에게 출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허리가 아플 지경이 되면 일어나 부들거리는 손에 니코틴 한 조각을 끼워서 불을 붙인다. 여전히 머리는 깨질듯이 아프다. 두통약을 연식 먹어대지만, 깨질듯이 아픈 머리는 좀체 가라않질 않는다.

점점 가슴까지 답답해져 온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대로 딱 멈치어 버리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약을 먹고 약기운에 의지해 잠이라도 청해보기로 한다.


윤동주를 모독하기 위하여

2002년 3월 1일 오전 4시 20분 59초

   새벽이 시작되는 깊은 밤 한가운데 앉아 하늘을 보니
  
오십여년 전에도 반짝였을 별들이
  
오늘도 '바람에 스치'우다가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는지 
   '
나를 부'른다. 
   '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며
  
깊은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육신은
  
싸늘한 바람 속에서 떨고 있다.
  
바람은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는 
   '
불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였지만,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도 아닌데 
   '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을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는 왜 이 밤의 별들을 
   '
아무 걱정도 없이 헤일 수' 없는 것일까? 
   '나이보다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란
   '슬퍼하는 자에겐 복이 있'다는 것뿐이고,
   바닥을 알 수 없이 공허한 이 가슴에는 
   '
꽃처럼 피어나는 피'만이 가득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해지기라도 할까?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진실로,
  
진실로
   '
부끄러운 일이다.'
 

고뇌

2002년 3월 7일 오전 1시 34분 40초

임의로 중단하고자 하는 것이 중단되지 않고 진행되는 어려운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지구 역시 자전과 공전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 두통과 몸살이 육신에서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존재해야 할 아무런 실제적인 이유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존재를 강요당하기 시작한지 벌써 2주가 훨씬 넘어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삶들과 부대껴야만 하는 순간순간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면 불면의 밤은 여지없이 멈추지 않고 찾아온다.

봄가뭄이 오래 지속된 탁하고 목마른 대기에 비가 내린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겨울과 달리 밋밋하게 끝나가고 있는 이번 겨울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비일까 싶었는데, 비가 그친 하늘에선 영원한 겨울을 준비해야할 나를 위함인지 황량하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에는 싸리눈과 함께 떨어지는 비를 굳이 피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를 정면으로 맞이하였더니 다시 가벼운 한기를 느낀다.
몸을 녹일 요량으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고 온 몸을 적시는 것을 고개를 숙인 채 바라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의 감촉이 온 몸에 스며드는 순간,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감상의 메아리는 한 번 시작된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한다. 마침내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온 몸으로 받으며 오래도록 좁은 어깨를 들썩인다. 


   나의 침묵이
   차가운 가을바람처럼 황량하고,

   나의 육신이
   분노한 사티로스의 망령에 쫓기고,

   나의 관념이
   음침한 타락의 발걸음으로 경쾌하고,

   내 대뇌가
   질척이는 진창에 뇌수를 흘릴 때,

   나의 고뇌는,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나의 이 고뇌는
   황홀한 쾌감으로 격렬한 파동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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