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글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오늘도 거리에서 불의한 세상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안온하고 평이한 삶을 거부한 채 고단하고 질척이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늘 느끼는 부끄러움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과 같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던 고 김대중 선생의 말을 새기면서도 하루하루 벌레처럼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건 뭔가? 사람이 어떤 다른 정신에 장악되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과 입이 돌아가고 미친 말을 해 대는 것만 귀신 들린 게 아니다. 진짜 심각한 귀신 들림은 오히려 겉보기엔 멀쩡해서 귀신 들렸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 <예수전> p35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가 김진숙이나 체 게바라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양심이 악의 편에 좀먹지 않도록 늘 깨어 있게 노력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최소화하는 것이리라 자위한다. 그렇게 늘 깨어 있기 위해 나는 김규항의 책 <B급 좌파>와 <나는 왜 불온하가>를 가까이에 두고 때때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어 보곤 한다.
거기에 씌어 있는 어떤 문장도 단숨에 쓰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한 자 한 자가 온몸의 피를 쥐어짜듯 토해져서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된 그의 글에는 아픔, 고민, 사색, 진정성이 있고 거기에서 정신, 분노, 저항,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제 그의 <예수전>도 앞으로 두고두고 내 가까이에 놓고 때때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어 볼 책 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그런 혁명을 바란다. -- p169
중세 카톨릭 만큼이나 부패하고 타락한 오늘날의 개신교와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신도들로 인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폄하되어 본질이 흐려지고는 있으나, 예수의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모두가 받아들인다면 마침내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예수는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믿음’을 가지라고.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느님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중략)…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교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온 세상에 관련하며 온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준비하는 존재다. 믿음은 결국 하느님 나라,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이다. -- p185
물론 나도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라는 회의는 든다. 김규항도 본문에서 말했듯이 모든 사회 성원의 이해와 정체성이 완벽하게 하나인 세상이 아닌 한 불평등한 관계는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설혹 모든 사회 성원의 이해와 정체성이 완벽하게 하나로 모아진다 하더라도 욕망이 거세된 세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동은 고사하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발적 노동이 이어질 수 있을까? 모두가 김진숙이나 체 게바라가 될 수 없듯이 모두가 예수가 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에서도 언젠가 웃음 지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긍정적인 에너지로 세상을 충만케 하고 있다. 그 에너지가 모이고 모이면 거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관계로 세상은 무한 수렴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나는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 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 p80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이 결국 예수의 가르침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벌레처럼 오늘도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깨어있기만 한다면, 그 변화에 조금씩 조금씩 동참해 가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히 억울하면 벽에 소리라도 질러보면서...
우리가 애끊는 순간은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 아이나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면할 때다. 그런데 예수는 난생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 p38~39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 p59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 p110
사람이란 대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중세의 암흑을 무너트리는 훨씬 더 어려운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덕에 그들 스스로가 법적인 차원에서나마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실은 그들이 그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진짜 극복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제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은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 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 -- p112~113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 ‘정당한 방법’이란 ‘합법적인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법이란 한 사회의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을 기반으로 사회 성원들을 강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공정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 성원의 이해와 정체성이 완벽하게 하나인 사회가 아니라면, 모든 사회 성원에게 공정한 법은 존재하려 해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은 어느 탈옥수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작은 잘못에 엄격하지만 힘세고 부자인 사람의 큰 잘못엔 늘 관대하다. 그런 현실에서 부가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주장이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쌓은 부는 정당하다는 주장은 기만적인 것이다. -- p161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제 새끼가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 ‘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모도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 p238~239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라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인 그가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예수가 영성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영성가인데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영성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예수가 비폭력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비폭력주의자인데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비폭력주의자’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서 예수의 모습에서 제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똑 떼어 내어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입네, 예수는 영성가입네, 예수는 평화주의자입네 하는 것은 예수를 욕보이는 일이다. 사형은커녕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흉내로 세상의 존경과 명예를 구가하는 건 예수를 팔아먹는 짓이다.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어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좇는 사람은 지배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가 살던 세상처럼 지배체제와 불화했다고 쉽게 죽임을 당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체제의 직간접적 탄압과 주류 사회에서의 배제,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에게서(심지어 같은 길을 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일어나는 오해와 곤경은 다르지 않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 p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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