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딴지 영진공 비됴 검열위
2002년 4월

 

자~ 왔어요, 왔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냐. 애덜은 가, 애덜은 가.

코딱지만한 나라에 800개가 넘는 영화관이 우후죽순 솟아있고, 백화점을 지을래두 멀티플렉스가 들어서야만 건축허가가 떨어질 지경이며 연간 5천만명 이상의 영화인구가 극장을 찾는다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때는 바야흐로 따땃한 햇살이 아침마다 똥꼬를 찔러대는 초여름. 

니덜의 명랑 영화관람 추구권을 위하야 단 하루도 편히 발뻗고 디비져서 콧구멍 귓구멍 정화작업에 전념해 보지 못하고 있는 본 공사, 어떡하믄 니덜의 나른하고 궁상시러운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것인가까지 고민하다 보니 봄맞이 특별 기획 씨리즈를 통해서 갖가지 기능성 비됴들을 소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도다.

그렇담 본 우원이 오늘 들고 나온 비됴들은 또 무어냐? 미제 및 국산 영화는 다 거기서 거기 같고 도대체가 신선함을 못 느끼는 미제 및 국산 영화 불감증 환자덜은 물론이요 유럽 및 제3세계 영화들은 무조건 몽조리 난해하고 지루하기만 하다는 후천성 편식증후군 환자덜에게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비됴들로서 동네 비됴가게 어디를 가도 구석탱이 어딘가에 하나쯤은 짱박혀 있는 작품들 되겠다. 

자, 따라와라. 쪼메 지루한 것 같아도 볼 만한 구석들이 있는 필관 비됴들이니까.


성스러운 피 (Santa Sangre)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89년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공동 제작한 것으로 그 이름도 졸라 컬트틱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역작 되겠다. 당 영화를 이야기 하자면 당 영화에 각본, 감독을 맡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를 먼저 디벼볼 필요가 있으므로, 과연 이 넘이 어떤 넘인가 보도록 하자. 디벼보기 싫어도 본 우원이 디벼보기로 작정한 이상 걍 디벼보자. 

칠레에서 태어난 러시안계 유태인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25살까지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떠돌아 댕기다가 파리로 건너가서 팬터마임의 대가 에티엔느 두크레에게 마임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때 같이 수학한 동기가 마임의 피카소라 불리는 마르셀 마르소이다. 조도로프스키가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유유가 상종한 모양이다. 

당시 조도로프스키는 팬터마임에 관한 영화와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을 영상화한 실험적인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동네 카페에서 상영하였는데, 들리는 바로는 그 영화들을 보고 사람들이 환장을 했다고 하고 그 중에 한 넘인 장 콕도는 "따거"를 연발했다고 하는데, 장 콕도가 그 당시 중국어를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 영화에서도 졸라 현란한 마임쇼가 등장하는데 그거 보는 재미만으로도 벌써 본전은 충분히 뽑을 수 있으리라 사료됨이다. 

이후 조도로프스키는 리들리 스콧, 테리 길리엄, 오시이 마모루, 피터 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만화작가 뫼비우스(SF 만화 잡지 메탕 위를랑(미국의 성인만화잡지 헤비메탈의 전신)을 창간, 그래픽 아트를 연상시키는 신비롭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쟝 지로가 본명이란다)와 <잉칼:존 디풀의 모험>을 작업하였고, 67년 <판도와 리스>로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70년 <엘 토포>라는 컬트 영화의 고전에서 감독, 주연, 각본, 음악, 미술 등등 1인 9역을 맡아서 혼자 다 해처먹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엘 토포>가 얼마나 뻑가는 것이었는지 이 영화에 감동 먹은 넘들이 앤디 워홀, 믹 재거, 데이빗 보위 같은 희대의 싸이코들이었고, 존 레논은 <엘 토포>에 허벌나게 심취한 나머지 이 영화의 판권을 아예 구입해 버려서 <엘 토포>의 전 세계 판권은 애플 레코드사가 갖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후 이 넘은 장장 10년 동안 영화 <사구>를 제작하려고 똥꼬털에서 땀방울 떨어지게 뛰다니가다 지 아들인 보론키스 조도로프스키와 오손 웰즈, 살바토레 달리, 글로리아 스완슨 주연으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상영시간을 16시간짜리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우덜이 알고 있는 영화 <사구>는 데이빗 린치에 의해 만들어진다. 

데이빗 린치의 <사구>는 80년대 초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 필적할만한 철학적 SFX 대서사시로 완성되었는데, 조도로프스키는 이 영화를 보고 "질투 때문에 일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 넘의 황당한 똥고집으로 만들려다 무산된 또 하나의 영화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걸작 <네이키드 런치>가 있다. 

아이, 씨바.. 그런 넘이야? 그럼 <성스러운 피>는 안봐도 파노라마라구 단정지어 버리는 불순 반동 세력 있을 줄 안다. 글타. 사실 <성스러운 피>도 거기에 등장하는 신화와 상징, 은유와 전설을 일일이 해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좌측후두부경련 후 마비현상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관람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때에 따라서 영화는 그저 보여지는 그대로의 이미지와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우덜의 가슴에 삘 꽂히게 할 수도 있다. 당 영화 <성스러운 피>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관람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20여년전 멕시코에서 한 젊은 남자가 30명의 여자를 살해하여 정원에 파묻어 버린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당 영화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대립되는 색의 이미지와 멕시코의 거리음악을 환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로 펼쳐 보인다. 그렇게 색의 이미지와 환각적인 음악으로 펼쳐주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젖어서 당 영화가 그저 보여주는대로 니덜의 가슴을 열어두다 보면 경험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니덜의 영혼에 잊을 수 없는 컬트의 매혹적인 상처가 생기는 것을. 

한가지 조까튼 점은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무리 얘길 해도 도대체가 안심을 못하시는 우덜의 자애로우신 가위손들께서 우덜의 상처가 너무 깊어지는 것을 염려하시어 일정 시퀀스를 통째로 들어내 버리거나 군데군데에 자애의 흔적을 툭툭 흘려 놓으셨다는 점이다. 당 영화를 관람하기에 앞서 그 분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떠올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불끈 들어올려 경의를 표해주기 바란다. 


순수의 비행(La Corsa Dell'Innocente)
 

 

상처난 영혼을 오래 끌어앉고 있으면 정신이 황폐화된다. 황폐화된 정신을 걍 놔두게 되면 어차피 조까튼 세상이니 명랑사회 건설해서 모하냐는 네거티브적 허무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최근 반장선거 후보에 출마하려다 줄반장 후보 경선에서 노풍에 물먹은 인죄가 네거티브 전략을 써먹더니 결국은 니덜끼리 다 해먹으라면서 줄반장 후보 경선에서도 사퇴하여 판을 깬 걸 보믄 네거티브란 어쨌든 명랑사회 건설에 불필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오매불망 명랑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본 공사의 이념에 따라 본 우원 역시 니덜이 네거티브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가 엄따. 그러므로 상처난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당 영화를 강력히 권하는 바이다. 본 우원, 어쩌면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지 몰겠다. 보고 배우길 바란다.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92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동 제작한 것으로 각본과 감독을 맡은 카를로 카를레이의 썩 훌륭한 데뷔작 되겠다. 난중에 이 넘이 헐리웃에 진출하여 만든 <플루크>는 굳이 이 넘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아도 양산해 낼 수 있는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이지만, 이 넘이 <순수의 비행>에서 보여준 놀라운 참신성은 <플루크>와는 그 격조에 있어서 비할 바가 아니므로 혹여 <플루크>로 인해서 당 영화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당 영화는 자고 깨면 총질을 일삼는 마피아 가문에서 태어난 천진난만 순진무구의 소년 비토가 경쟁관계의 마피아 조직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까지 죽이러 쫓아오는 킬러를 피해 도망댕긴다는 이야기 되겠다. 잔혹하고 무자비하며 고래심줄같이 끈질긴 킬러, 아슬아슬하게 도망댕기는 쥔공, 사정없이 죽어 나가는 쥔공 주변 인물들, 어디선가 많이 본 뻔할 뻔짜 스토리라고 눈치까는 넘들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누누히 강조하거니와 영화의 쉣스러움은 스토리의 진부함이 아니라 진부한 스토리를 얼마나 영삼스럽고 고리타분하게 늘어 놓느냐 하는 데에서 쉣스러움의 가공할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당 영화는 그 진부한 스토리를 속도감 넘치는 편집과 사실적인 화면을 통해서 매끄럽고 흥미진진하게 연출하여 시종일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면서도 폭력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순수한 한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거 이거는 니덜의 정신 건강에 유익하므로 잘 따라서 하고, 저거 저거는 니덜의 정신 건강에 유해하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좃선식 계몽주의를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보편타당하고 순수한 선이 비타협적이며 폭압적인 악에게 쫓기고 내몰리고 위협받고 살해당하는 과정을 어설픈 극적 겐세이 없이 담담하고 섬세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우덜 안의 따사롭고 부드러우며 순수한 감성을 지긋이 자극한다. 


퍼니 게임(Funny Games) 

<순수의 비행>이 우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의 관점에서 폭력을 바라보았다면, 당 영화 <퍼니 게임>은 우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의 관점에서 폭력을 바라본다. 당 영화가 전율스러운 것은 단지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나도 흔해 빠져서 일상화 되어 버린 폭력의 적극적인 공범자 내지는 동조자 혹은 방관자로 우덜을 끌어 들인다는 점이다.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97년 독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독일 태생의 오스트리아 거장 미카엘 하네케의 살떨리는 걸작 되겠다. 미카엘 하네케는 폭력 3부작이라 불리는 <7번째 대륙> <베니의 비디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을 통해서 아는 넘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름 꽤나 날렸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본 우원 폭력 3부작 중 하나도 본 게 없어서 폭력 3부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몰겠다. 

또한 작년에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 남녀주연상을 휩쓴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노 선생님>이 온갖 찌라시에서 오도방정을 떨며 찬양되어지길래 국내 개봉이 이루어질 줄 알고 목 빼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개봉의 개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 영화 <퍼니 게임>을 보구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지는 넘들 중에서 혹 생활이 넉넉한 넘이 있다면, <피아노 선생님>두 수입하여 국내에 개봉해 주기 바란다. 

생활이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본 우원의 간절한 염원을 쌩까는 넘이 발각될 시에는 계란을 빌리러 가게 됨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근데 이건 당 영화가 보여주는 줄거리이기도 하다. 당 영화는 본 우원의 강짜처럼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는 한 가족의 수난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호숫가 별장에 당도한 게오르크 가족에게 옆집에서 심부름 왔다는 낯선 청년이 계란을 빌리러 온다. 선선히 계란을 내주며 포장해 주겠다는 계란을 덜렁덜렁 들고 나가던 이 넘, 계란 4개를 들고 문을 열려다 바닥에 깨먹어 버린다. 

근데 계란을 깨먹고 졸라 미안해 하던 넘이 자기는 단지 계란을 빌리러 왔으니 다른 계란을 빌려 달란다. 딱 적반하장이다. 슬슬 기분이 조까타지기 시작하지만, 이웃과의 친분을 생각해서 다시 빌려 주려고 하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핸펀을 물에 빠뜨려 버린다.

짜증으로 꼭지가 돌 지경이지만, 실수를 미안해 하면서 실실거리는 넘에게 대놓고 화를 내는 것도 우습다. 서둘러 계란을 꽁꽁 포장하여 건냈더니만 계란을 들고 나갔던 넘이 개가 덤벼들어서 또 깨먹어 버렸다고 유들유들 뺀질뺀질한 넘과 같이 찾아와서는 계란을 다시 빌려달라고 생떼를 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격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게오르크 가족은 계란을 줘서 이 넘들을 쫓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넘들에게 계란은 그저 빌미일 뿐이었다. 

계란을 받아 든 이 넘들은 골프채를 휘둘러 대면서 게오르크 가족의 신경을 건드리고 마침내 더러운 똥을 적극적으로 치우려는 가족에게 똥도 무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이 넘들의 뻔뻔함을 더이상 참지 못해서 쫓아내려는 남편 게오르크는 골프채에 다리가 또각 부러져 버린다. 

이제 재밌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살아남을 것. 과연 게오르크 가족은 그저 재미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이 넘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넘들은 그 게임의 공범자 내지는 동조자 혹은 방관자로서 바로 당 영화를 보고 있는 우덜 자신을 지목한다. 수많은 액숑 영화와 폭력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폭행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우덜에게 이 넘들은 우덜도 이 게임에 동참할 것을 속삭이고 채근하다가 윙크까지 해댄다. 


97년 제 50회 칸에서 불쾌한 장면 몇 있음이라는 경고성 멘트가 덧붙여져 상영된 당 영화는 그 불쾌함이 결국은 우덜 자신이 속으로는 은밀하게 원해왔던 것 아니냐고 뻔뻔스럽게 충동질한다. 그 충동질은 기존의 헐리웃을 비롯한 온갖 상업적 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며, 그 비판을 미카엘 하네케는 기존의 영화적 관습의 테두리를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다. 

롱 테이크. 많이 들어 본 업자 용어일 것이다. 이른바 길게찍기 혹은 오래찍기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샷을 끊지 않고 한 번에 쭈우욱 찍는 걸 말한다. 롱 테이크가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롱 테이크, 롱 테이크 해대냐고 하는 불한당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롱 테이크 이거 정말 어렵다. 생각해 봐라. 샷을 딱 딱 끊어서 찍으면, 잘못 찍을 경우 고 샷만 다시 찍으면 되지만, 최소 2, 3분에서 길게는 10분이 넘는 샷을 다 찍었는데 잘못 찍었을 경우 다시 찍을려면 필름값이 얼마나 더 들겠냐? 필름값 이거 장난 아니다. 그러므로 롱 테이크 이거 아무나 막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 영화에서는 순전히 실수로 어린 아들이 젤 먼저 죽어 버리는데, 아직 죽이면 안돼는데 벌써 죽여 버렸다고 두 넘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싸우다가 게오르크와 아내를 묶어 놓은 채 어딘가 나가 버린다. 


어처구니없는 또라이 두 넘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하고만 있던 부부에게 어린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얼마만한 청천벽력이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당 영화는 딱 세 번의 팬(카메라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 카메라 헤드만을 좌, 우로 회전시켜 촬영하는 방식)만으로 10여분에 달하는 엄청난 롱 테이크를 선사한다. 안타까운 것은 필름으로 영사되어 볼 때보다 비됴로 볼 때 당 영화가 비교적 어두워져 보이는 탓에 이 전율스런 롱 테이크 장면이 필름으로 봤을 때 만큼의 감동을 비됴로 첨 봐서는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짤 수 있겠는가? 극장에서 못보면 비됴로라도 봐야지. 대신 좋은 동네 사는 독자라면 오백원으로도 빌릴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상으로 니덜 살아 생전에 한 번쯤은 꼭 봐 두어서 명랑 영화관람을 위한 정서 함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아닐지는 니덜 알아서 하고) 유럽 및 제3세계 비됴 3편을 디벼보는 유익한 시간을 본 우원과 함께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매우 훌륭한 비됴들이 많이 있으나 누차 말했다시피 본 우원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다. 추후 기회가 되믄 새로운 비됴로 다시 만나도록 하자. 이상, 졸라. 

딴지 영진
유럽 및 제3세계 무비 전문 디빌링 우원
백운수



슐웩이야기

영화2011. 6. 19. 01:32

옌날에 옌날에 오래 된 옌날에, 뒤질랜드라는 나라에는 별의 별 별종들이 다- 살고 있었대요. 고짓말만 하믄 코가 늘어나는 나무 인형부터 시작해서 늑대보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 뙈야지 삼형제, 일곱명이나 되는 난장이를 델구 다니는 불노불사의 공주, 항상 지저분한 쥐떼들을 빠순부대로 몰고 다니는 피리부는 부랑자, 새엄마와 이복언니들의 구박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유리구두 한 짝으로 팔자가 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부억떼기, 게다가 어른이 되는 게 싫다고 자기 그림자를 한사코 띠 놓고 다니는 철부지와 그를 추종하는 꼬마마녀까지 있었어요.

사람들은 뒤질랜드의 별종들을 아주아주 사랑했는데, 그것은 뒤질랜드의 별종들이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래요.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엽기적인 환상을 그 별종들을 통해서 대리 체험하는 까탈시스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대요.

그 환상의 나라 뒤질랜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드론우웩-스라는 늪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슐웩이라는 덩치만 졸라 크고 지지리도 덜 생긴 초록 괴물이 살고 있었대요. 전설에 의하면 도론우웩-스를 지배하고 있는 세 명의 마법사 중 하나인 제프레 깝죽버그라는 마법사가 슐웩을 창조했대요.

제프레 깝죽버그는 예전에도 팀 버튼이라고 불리는 반골 내공 10갑자의 초절정 고수와 함께 쿠리스마스 이브에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악몽을 획책한 적이 있었는데, 예상외로 사람들이 별로 쫄거나 겁먹지 않고 강력하게 대항하는 통에 심각한 내상을 입고 한동안 찌그러져 있었어요.

그러다가 에집왕자와 내통하여 홍해를 두 쪽 내더니 엘도라도에 가서 황금을 훔쳐 와서는 한동안 양계장을 운영하기도 했대요. 그렇지만 제프레 깝죽버그는 예전에 팀 버튼하구 획책했던 쿠리스마스 이브의 악몽을 재현해 보구 싶어서 늘상 똥꼬를 긁적였대요.

오랜 세월 똥꼬를 긁적이다가 피떵을 싸기도 하던 제프레 깝죽버그는 드디어 회심의 역작을 창조해 냈으니 이름하여 슐웩이라는 덩치만 졸라 크고 지지로도 덜 생긴 초록 괴물이었대요. 그러니 이 초록 괴물 슐웩의 성깔이 어떨까요? 맞잖어요, 졸라 더러웠어요.

지 생긴 꼬라지가 그래서 그런 걸 가지고 사람들이 지하고 안 놀아 준다고 꼴같잖게 삐져버린 이 초록 괴물은 드론우웩-스 늪에 혼자 쳐 박혀서는 총천연색 동화책으로 똥꼬 닦기, 악어눈깔로 눈깔죽 끓여 먹기, 바퀴벌레하고 거머리가 득시글거리는 진흙으로 샤워하기 같은 걸 하면서 놀았대요.

그러던 어느날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햇님이 바짝 쫄아서 오줌을 지리던 날, 초록 괴물 슐웩은 일생일대의 미수테이프를 자르고 말았으니 바로 수다쟁이 당나귀 똥끼를 만난 것이었어요. 대가리크기가 몸뚱아리 크기하고 비슷한 이 당나귀 똥끼는 함 주둥이가 열렸다 하면 엄청난 속도로 나불거렸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려 한다는 걸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당나귀였대요.

한편, 뒤질랜드에서는 별볼일없는 재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던 수많은 별종들에게 드디어 운명의 심판이 내려지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더이상 그 별종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말았던 거시었어요. 아무리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대변해 준다고 하지만, 현실감각이라곤 솔잎에 붙은 송충이 발꼬락 사이의 때만큼도 없이 주리줄창 권선징악으로 개그할락 하고 해피엔딩으로 혹세무민할락 하니 식상해져 버린 거시었어요.

그러자 뒤질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위대하신 영도자 팍와도 영주는 줄어드는 관광수입으로 나라 경제가 거덜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어 구국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으니, 쓸모없이 밥이나 축내고 있는 별종들을 모다 내쫓아 버리고 오래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전설의 제국 아똘랑티스를 뒤질랜드에 재건하여 스스로 제왕이 되려는 야심찬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좁쌀만한 눈깔을 희번덕거렸어요.

근데 그 계획이란 것이 쪽빠리랜드라는 나라에서 이미 신비한 바다의 나댜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얘덜을 열광시켰던 쪽빠리메이션을 고대로 베낀 거래요. 기존의 것을 이리 뒤치고 저리 헤집어 마치 지가 완전한 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팍와도 영주로서는 이번에도 같은 수법을 울궈먹을락 했던 거지요.

원래 팍와도 영주는 시까고 뒷골목 출신의 천한 종자였는데, 할루드의 미끼마우스부대를 손에 넣은 후 승승장구하여 뒤질랜드를 세우고 스스로 영주가 되었던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 제왕이 되기 위해서 팍와도 영주는 제왕으로서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살림이 어려운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려고 했대요.

그래서 기회주의자 미러미러는 세 명의 공주를 팍와도 영주에게 후보로 추천하였는데 그 중에서 (찔러도) 피안나 공주가 팍와도 영주의 맘에 쏙- 들었대요. 하지만 피안나 공주는 입에서 불을 뿜어대는 드라공에게 잡혀서 사방이 용암으로 둘러싸인 성에 갇혀 있기 때문에 팍와도 영주는 야코가 팍- 죽어서 장롱다리를 동동거리며 대책을 강구하다가 늘상 그렇듯이 교활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꾀를 생각해 냈대요.

그것은 바로 덩치만 우라지게 크고 절라리 덜 생긴 드론우웩-스의 초록 괴물 슐웩을 이용해서 피안나 공주를 구해 오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니덜도 잘 알다시피 아무리 단순무식하구 덜 생겼더라도 쥔공만 되면 어떠한 난관이든지 아슬아슬하게 잘 뚫고 나가잔아요.

그래서 팍와도 영주는 그동안 밥만 축내고 있던 별종들을 무더기로 드론우웩-스 늪으로 보내 슐웩을 회유하려고 하였고, 그 협상팀의 선봉장이 바로 수다쟁이 당나귀 똥끼였던 거시었어요. 당나귀 똥끼의 숨쉴틈 없이 몰아부치는 수다에 질려 있던 슐웩은 오만가지 별종들이 자신의 드론우웩-스 늪으로 몰려들자 기겁을 하고야 말았어요.

결국 슐웩은 뒤질랜드로 가서 팍와도 영주 앞에서 굴라디에이터 막시와 무스의 흉내를 내어 굴라디에이션을 펼쳐서 팍와도 영주를 뿅가게 했대요. 그리하여 팍와도 영주의 지엄하신 분부를 받잡고 피안나 공주를 꼬불쳐 오는 임무를 맡게 된 슐웩은 수다쟁이 당나귀 똥끼와 함께 환타스틱 어드벤쳐를 떠나게 된 거시었어요.

그 환타스틱 어드벤쳐가 잼있을까요?
예, 절라리 잼있어요.
근데 수다쟁이 당나귀 똥끼는 왜 같이 가는 거냐구요?
다 써먹을 데가 있대요.
피안나 공주를 어떻게 구하느냐구요?
다 구하는 수가 있대요.

말하는 꼬라지가 더이상의 내용을 알려줄 것 같지 않지요? 어데가서 밥이라도 비러먹을라믄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굶어죽지는 않겠네요. 다 얘기해 버리믄 니덜한테두 결코 이득이 아니기 땜에 말하지 않는 거니깐 넘 조까따고 생각하덜 마세요.

그니깐 궁금하면 니돈 내구 극장에 가서 관람하세요. 속는 거 아닐까 걱정하시는 넘들, 최소한 덜 생긴 초록 괴물 슐웩과 수다쟁이 당나귀 똥끼와 (찔러도) 피안나 공주 셋이서 화려하게 수놓는 쑈! 쇼! 쑈! 만으로도 니덜의 생돈 칠천원이 허공에 뿌려진 눈물로 화하진 않을테니 안심하시구요.

오늘 이야기는 이걸루 끝내야겠네요. 아무리 '옌날에 옌날에 오래된 옌날에 로 시작하였다고 해서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해서 쥔공들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대요'로 끝날 수는 없는 거잔아요. 가끔씩 이렇게 끝나기도 할 수 있는 거니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사덜 마세요.

그럼, 빠빠루~



 

 

 

 

 


지금은 15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몸을 볼썽사납게 뛰뚱거리며 '거만하고 괴팍한 노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뿐이지만, 스타니 슬라브스키가 주창했던 메소드 연기의 탁월한 전도사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말론 브랜도에게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칼이수마가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론트>, <대부> 그리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르기까지 말론 브랜도를 떼어 놓고 그 영화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론 브랜도는 강렬한 칼이수마를 그 영화들 속에서 구현해 냈고 말론 브랜도 칼이수마의 최정점이자 최후로 나타난 영화가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을 찍으면서 난항을 거듭하던 코폴라는 고집불통 말론 브랜도의 갖가지 트집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약속한 만큼 체중을 줄이지 않고 나타난 브랜도는 스크립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커츠 대령이라는 이름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라일리 대령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제작진과의 대화가 순탄치 않게 되자 코폴라는 브랜도에게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죠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읽어 볼 것을 권유했고, <암흑의 핵심>을 읽고 난 브랜도는 다음날 아침 별안간 머리를 박박 깍고 등장하여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완전히 명백해졌다." 

그래서 똥꼬털에 묻어 있는 온갖 분미물들을 탈 탈 탈 털어내고 똥꼬 세척 재계한 후 면벽 참선의 자세로 각 잡고 앉아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단숨에 정독한 나는, "그래! 이제야 모든 것이 맵핵을 띄운 것 처럼 완죤히 분명해졌다." 라고 선언했.... 으면 좋겠다만... 졸라, 나는 브랜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박박 깍고 싶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 무려 삼주간을 오만가지 자료들을 긁어모으며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졸라 들뜨고 똥꼬 발발거리는 심정으로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였고 수십번도 더 본 <지옥의 묵시록> 비됴를 또 봤고 우연한 기회로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다시 한 번 관람하였으나 아직도 나는 포연에 싸인 정글의 한 가운데 내팽겨쳐져 있다.
 

'시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글케 골 뽀개는 영화였냐? 조뙜따. 영화사에 남을 전쟁 영화의 걸작이라구 해서 앤하구 같이 볼라구 예매해 놨는데 이제 앤한테 맞아 죽게 생겼따.' 라고 똥꼬 움찔거릴 넘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쫄 거 없다. 걍 가벼운 맘으로 가서 보믄 글케 잼없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다만 러닝 타임이 쫌 많이 긴 관계로 떵 같은 건 미리 미리 때려 놓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는 것은, 다른 모든 예술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어떠한 예술도 그것이 창작자의 의도 그대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는 없으며 대중은 각각의 개인적 경험과 환경에 의해서 똑같은 예술 작품에서 전혀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술에 탐닉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다양한 예술적 창조 작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온갖 찌라시들에서 나불거리는 대로 마치 전지구적 신화인양 고무찬양되고 똥꼬를 높이 치켜 들어 경배해야 마땅한 영화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온갖 찌라시들에서 한결같이 주둥이를 모아서 똥꼬를 치켜드는 꼬라지에
배알이 꼴려서 어떡하든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의 흠집을 잡아 볼라구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나오느니 감탄의 한숨이요 느껴지느니 쫄아든 뽕알같이 왜소해지는 나의 존재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광기를 탁월하게 묘파한 전쟁영화의 걸작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묘파했는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탁월한 건지는 두리뭉실 넘어가 버리는 여타의 찌라시들과는 격을 달리하여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관람하면서 니덜이 니덜 앤한테 졸라 잘난 척 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보 및 해석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어때, 졸라 친절하지? 너무나도 너그럽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 아니냐?
보고 배워라, 응?
 

그러나 앞서 연막작전 핀 것처럼 나 역시 아직도 포연 가득한 정글에 빠져 있는 기분이며, 영화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므로 내 해석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를 보는 관점에는 이런 것도 있고, 어디까지나 니덜 앤한테 졸라 잘난 척 할 때 참고로 써 먹으라는 것뿐이라는 것을 밝혀 두는 바이다.
 

또한 내가 지금부터 풀고자 하는 썰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분히 포함될 것이므로 영화의 내용을 알고 영화를 보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는 넘들은 지긋이 '뒤로' 화살표를 눌러 주길 바란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읽고 나서 이 영화에 선입견이 생겨서 명랑영화관람 추구권을 침범당했다고 복날 썬오브독 처럼 앙탈부릴 태세를 갖춘 넘들 역시 지긋이 '뒤로' 화살표를 눌러 주길 바란다.
 

서론 졸라 길었다. 그럼 본론 들가겠다.
두두둥~ <-- 조또 웅장한 초저베이스 인트로 사운드로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는 이미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죠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1902년)에 영감을 얻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존 밀리어스와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서 1979년 갖은 사투 끝에 제작하였고, 그 해 깐에서 그랑프리 먹고 기타 여기저기서 주는 상 받아 먹다가 1979년 당시의 여러 사정상 짤라 내야 했던 부분을 복원하고 디지떨로 재마스터링하여 2001년 깐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22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세인들의 예민한 귀두를 꼴리게 한 장본인 되겠다.

이 영화의 탄생과 부활에 얽힌 기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천지 사방에 널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기본 정보만 가지고 바로 영화 속으로 쑥- 들어가 보자. 영화는 평화롭게 잎새가 팔랑거리던 조용한 숲이 네이팜탄의 시뻘건 불꽃으로 일순간에 삼켜지면서 시작된다. 

간간히 헬기의 프로펠라 돌아가는 소리가 꿈꾸듯 들리는 가운데 도어즈의 <The end>가 흐르고 불타는 숲을 천천히 보여 주던 화면 위에 윌라드 대위(마틴 쉰)의 거꾸로 누워 있는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 공허하고 무신경한 시선에는 초점이 없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녹음의 숲이 일순간에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에서 전쟁은 그렇게 급작스럽고도 전폭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린다는 것을 상징하고, 그 한가운데 거꾸로 처박혀 있는 우리는 이내 공허하고 무신경하게 전쟁 속에 함몰되어 갈 것임을 보여 준다.

이어서 등장하는 호텔방 씬에서 윌라드 대위 역의 마틴 쉰은 인간의 본질적 고독과 공허 속에서 드러나는 극렬한 광기를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해 냈다. 원래 윌라드 대위 역에는 하비 케이틀이 내정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약한 듯 하면서도 집요하고 상처받기 쉬운 듯 하면서도 강인하며 졸라 특이한 듯 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윌라드 대위라는 캐릭터에, 만만치 않은 칼이수마를 보유하고 있는 하비 케이틀의 색깔은 부조화스러운 감이 있어서 촬영을 한 달여 앞두고 전폭적으로 마틴 쉰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사실 하비 케이틀 이 넘, 칼이수마 하면 또 한 칼이수마 하잔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은 시종일관 윌라드 대위의 시점을 따라 가고 윌라드 대위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종종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 보면서 말한다. 그건 관객들로 하여금 윌라드 대위라는 인물과 동화되어 그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인데 하비 케이틀 같이 한 칼이수마 하는 넘한테 감정 이입을 할라믄 관객들이 얼마나 껄적지근 하겄냐?

그런 면에서 마틴 쉰을 기용한 것은 매우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보여지며, 마틴 쉰 역시 졸라 매력적인 캐릭터인 윌라드 대위역을 절대로 오바하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물론 그때까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왔던 마틴 쉰을 전격적으로 기용하여 그러한 내공을 뿜어 내도록 유도한 코폴라의 연출 공력에 새삼 똥꼬 저미는 감탄이 토해지게 된다만.

아무리 여러번 봐도 전율스러운 오픈닝 시퀀스을 지나서, 상부의 인가도 없이 이중간첩이라는 이유로 4명의 베트남인을 처형한 후 살인죄로 기소된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이 캄보디아 국경 근처로 잠적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벌이는 것에 위계질서의 위협을 느낀 군 당국으로부터 커츠 대령의 암살 지시를 받은 윌라드 대위가 수송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전개된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갖가지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보여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면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서핑을 하기 위해서, 바그너의 <발퀴레> 선율에 따라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헬기 공수 부대를 진두 지휘했던 킬고어 대령(로버트 듀발)이 나온 에피소드일 것이다.

발퀴레는 '전쟁에서 죽은 용맹한 전사들을 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나르는 전령'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니깐 거기서 <발퀴레>를 하늘이 떠나 가도록 틀어댄 건 음악이 웅장하고 멋쪄서만 그런 게 아녀. 죽더라도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으니깐 천국가게 해 달란 것이지. 그러면서 총들고 대항하는 넘이든 도망가는 넘이든, 아새끼든 아녀자든 닥치는 대로 쏴 죽여 버리는 악랄한 야비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숲 속에 숨어서 대항하는 베트콩 때문에 서핑을 할 수가 없다고 숲 전체를 네이팜탄으로 날려 버린 킬고어 대령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서핑조차 맘 놓고 즐길 수 없는 고약스런 것이고 이른 아침 네이팜탄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정적 속에서 퍼져 나오는 가솔린 냄새를 맡으면서 희열을 느끼며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시체 위에 자신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카드를 던져 놓다가도 부상당한 적에게 값싼 휴머니즘 쪼가리를 내던져 주는 위선과
기만을 몸소 실천한다.

"몸에 벌집을 내 놓고 반창고를 붙여 주려고 호들갑을 떤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위선이다... 역겨운 기만이다..."

코폴라는 그 역겨운 기만행위를 킬고어 대령의 서핑 보드를 훔쳐서 달아나는 윌라드 대위를 통해서 조롱한다. 서핑 보드를 다시 돌려 달라고 헬기를 타고 정글을 헤집고 다니며 애걸하는 킬고어 대령은 블랙 코메디의 냉소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킬고어 대령의 에피소드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광기와 위선을 표현했다면,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 새로이 추가된 장면 중에서 연료를 주고 바니걸들의 몸을 사는 에피소드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쟁이라는 조롱박에 갇혀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한심한 운명을 상징한다.

바니걸과 빠굴을 뜨기 전에 쉐프(프레드릭 포레스트)는 바니걸에게 가발을 씌우거나 가슴을 살짝 드러낸 채 포즈를 취하도록 하고 랜스(샘 버틈스)는 바니걸의 얼굴에 갖가지 화장을 하면서 빠굴을 곧 뜰 것 처럼 하면서 시간을 끈다. 졸라 똥꼬 근지러운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니걸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횡설수설 늘어놓는데 그 골자는 자기들도 몸 팔아 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전쟁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끌려들어 왔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의 한 가운데서 가발을 쓰고 위장을 하고 총을 들어 싸워야만 하는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에서 추가된 에피소드 중에는 윌라드 대위 일행이 프랑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생필품을 조달하고 있는지 하는 의문점은 차치하고라도 프랑스인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프랑스인들의 자격지심이나 베트남전에 미국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끼어들었다는 것 등을 너무 설명적으로 드러내 버린다는 점에서 추가할 필요가 별로 없는 에피소드라고 생각된다.

다가 원래 그 에피소드에는 윌라드 대위와 록산느(오로 클레망)의 환상적인 빠굴씬이 있었지만, 프랑스 농가의 존재가 비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윌라드 대위의 실제했던 경험인지 몽환적인 상상이었는지 모호하게 두리뭉실 처리해 버리기 위해 빠굴을 막 뜨려는 순간 안개에 싸인 배 위에 앉아 있는 윌라드 대위의 모습으로 화면이 싹- 바뀌어 버린다. 졸~ 라, 아깝다. 그치?

이제 마침내 오프닝 시퀀스보다 딱 일곱배 정도 더 전율스러운 마지막 시퀀스에 당도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그치만 자기 자신도 오리무중인 영화를 니덜 모두의 명랑빠굴문화창달을 위한 잘난체용 정보로 환원시키느라 이박삼일 동안이나 두 손꾸락 높이 치켜 들고 자판을 뚜들기고 있는 나를 마저 따라와 주기 바란다.

아마도 커츠 대령과 같이 특이한 캐릭터는 영화사를 통 털어서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일 말론 브랜도라는 위대한 배우가 없었다면 커츠 대령이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강렬하게 특징지어졌을지도 의문이다. 3시간 15분의 러닝 타임 중에 30여분도 미처 등장하지 않는 말론 브랜도는 일순간에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해 버린다.

커츠 대령은 고대인들의 생활상와 종교적인 의식들을 기술한 제임스 조지 플레이저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를 옆에 두고 그러한 고대 의식에 따라 종교적인 교주처럼 군림하고 있다. 온갖 찌라시들은 커츠 대령이 명분없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밀림으로 잠적하여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커츠 대령의 행동에는 그렇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동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커츠 대령은 T. S. 엘리엇의 <공허한 인간(The Hollow Men)>을 읊조리며 사람의 목을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따 버리는 비정상적인 존재같이 보이지만, 내부 분열하는 자아의 정체성에 극심한 혼돈을 느끼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진리와 부조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편적인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윌라드 대위가 강을 거슬러 올라 커츠 대령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은 가장 보편적인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으로 접근해 가는 과정이며, 온갖 모순과 부조리로 둘러싸인 그 근원적인 심연은 뿌연 안개와 탁한 어둠에 싸여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다.

그 고통, 그 끔찍함, 그 공포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의 핵심에 접근할수록 점점 더 불확실해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핵심에 접근해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우리 스스로일 뿐이고 윌라드 대위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대변한다.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의 상황과 설정과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가 지금 하루 하루 전투를 치루듯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메타포이다. 그것이 22년과 베트남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의 가슴에 전율의 감동을 꽂아 버리는 이유이다.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는 흔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 가치가 새로워지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다. 걸작이란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남게 되는 모양이다.



 

무섭고 엄하셨다는 기억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친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돌아가셨고, 나에게 있어 할머니라는 가슴 아픈 명칭은 온전히 외할머니에게서 비롯된다. 유아식 분유는 커녕 너무 빨아대서 어머니의 젖가슴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빈곤했던 시절, 연년생이었던 탓에 유일한 생명줄을 너무 일찍 빼앗겨버린 나는 하루 종일 빽 빽 울어댔다고 한다.

왜 우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 생명은 그저 배고픔을 참아할 수 없어서 목이 쉬어 가고,
그 어린 생명의 소란스러움을 당신의 등에 짊어지고 종일 종종거리시다가 밥알을 으깨어 물과 함께 먹이면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는 어린 생명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으시던 분이 내 외할머니였다고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따뜻함 탓이었는지 나는 유난히 외할머니를 따랐다.
어린 남매를 남겨 두고 외할아버지가 전쟁통에 실종돼 버리신 이후 평생을 농사일과 자손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 밖에 모르고 사신 외할머니는 병약한 아들과 철없는 딸이 늘 눈에 밟혀 두 집을 오가시며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배고픔에 종일 빽빽거리는 첫 외손자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 사랑에 보답하려면 할머니를 업고 지구를 한바퀴 도는 유람을 해 드려도 모자랄 터이지만,
아직도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주시는대로 받고만 있고 철없던 때에는 그것이 얼마만한 희생이며 사랑인지 깨닫지도 못했었다. 이유없이 강짜부리기, 공연히 투정하기 정도는 할머니에게는 그저 귀여운 어리광으로 비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내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불효막심했었는지 손톱만큼 정도만 깨닫고 있다.

할머니의 성품을 거의 그대로 물려 받은 외삼촌은 술, 담배는 물론이고 가정과 일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고 남에게 화를 낼 줄도 다툴 줄도 몰랐다.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고지식함은 융통성없음으로 선량함은 바보같음으로 너무나 쉽게 왜곡되고,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호의적이지도 않다. 고지식함을 조롱하고 선량함을 이용하는 세상은 외삼촌의 삶을 버겁게만 했고 누구에게 불평할 줄도 모르는 그는 그 모든 고뇌를 안으로 안으로만 삭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이 불행의 그림자는 그런 사람에게 더 쉽게 찾아온다.
불혹을 갓 넘긴 한창 나이에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여의 처절한 투병과 가족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끝내 생을 달리하던 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고스란히 통곡으로 나타내고 있는 내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시며 할머니는 석상처럼 침묵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내 어찌 백만분의 일이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만, 슬픔이, 그 도저한 슬픔이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어지게 되면 눈물마저 메말라 버리고 일시적 실어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나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전형적인 유교적 가부장제가 뿌리내린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자란 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잘것없는 권위와 부조리한 위계에 길들여져 있었고, 그것의 부당함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될 정도로 머리가 커지면서 나 자신의 극렬한 모순과 불합리한 행동 양식에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반항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내 안의 파시즘을 극복하려는 과정은 내 가정 안의 파시즘을 거부하려는 버둥거림으로 발전하여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어느날 현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대치되어 더이상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하였을 때, 할머니는 내가 양보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셨다. 할머니의 바람은 고성과 반목, 저주와 냉랭함으로 균열되는 가정이 화해와 평화로움으로 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할머니는 그것을 순종과 양보로 이루길 바라셨고, 내 신념은 부조리한 강압에 의한
일시적 평화가 결국 더 깊은 상처만을 남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었던가! 어쨌든 나는 당시의 내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출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였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만배사죄하여도 씻을 수 없는 죄악을 할머니에게 자행함으로써 할머니의 여린 가슴을 찢어 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떠난 이후 한끼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다는 할머니는 병색이 완연한 몸을 벌떡 일으켜 내 손을 어루만지시며 다시 석상처럼 침묵하셨다. 왜소하신 체구가 더욱 왜소해지신 할머니의 물기어린 눈을 바라보았을 때만큼 혀를 물고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을 정도로 자신이 미웠던 적도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가끔 서울 근교 비닐하우스로 밭일을 나가신다.
아무리 가족 모두가 이제 그만 나가시라고 해도  당신 평생에 유일하게 재미를 붙이면서 하시는 일이니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너무 심심해서 좀이 쑤신다고도 하시고 그렇게라도 바깥 바람을 쏘이시는 것이 오히려 할머니의 건강에 더 좋다는 판단에 이제는 할머니의 밭일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벽부터 하루종일 비닐하우스 안에서 쪼그려 앉아 밭일을 하시는 할머니가 늘 걱정도 된다.

밭일을 가지 않는 날이면 집앞 쓰레기 치우는 일이며 빨래며 집안 청소며,
동생의 두 돌 지난 첫 증조외손자 돌보는 일이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때때로 할머니가 그나마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 건 늘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즐거이 하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연세가 연세인 만큼 할머니의 건강이 항상 염려된다.
  
며칠전 퇴근후 집에 와서 할머니의 방에 인사드리러 들어가 봤더니, 그날따라 많이 핼쓱해진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평소 내가 가면 반가이 맞아 주셨는데 그날은 실눈을 뜨고 나를 보시는데 눈가에 눈물자욱이 선연하고 눈도 잘 뜨지 못하셨다. 더럭 겁이 나서 어디 편찮으신건 아닌가 싶어 이것저것 여쭤보면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앙상하고 주름지고 거칠거칠한 손.

그 손을 잡을 때마나 나는 한없이 밀려드는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을 느낀다.

"자꾸 눈이 가렵고 눈물이 나."

언제부터 그랬냐니까 이틀전 정도부터란다.

"이제 그만 안양으로 가고 잡프다. 거기서 며칠 살다가 가야지."

안양은 외삼촌의 식구들이 사는 곳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지만, 꾹 눌러 참고
그런 말씀 하시지 말고 병원에 가서 진료받으면 나아질 거라고, 눈 주위에 뭔가가 나서 그런 거 같다고, 마음 약하게 먹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중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할머니를 와락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물론 언젠가는 할머니를 보내 드리게 되겠지만, 아직도 나는 할머니가 없는 내 삶이
상상되지도 않고 만일 할머니를 보내 드려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더더욱이나 상상되지 않는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
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나는 늘 할머니를 생각한다. 이제 와서 하면 뭐 하느냐고, 없어도 불편한 줄 모르겠다고 끝내 고집하시는 바람에 앞니 하나가 빠진 채로 지내고 계시지만, 그 모습으로 웃으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참 행운아라고, 아직도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얼마만한 복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복을, 그 사랑을 만분의 일이나마 돌려 드려야겠지만, 아직도 나는 돌려 드리는 것보다
받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항상 죄스럽고, 그래서 항상 행복하다.


최근 영화 <집으로...>가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면서 흥행에 성공을 하고 있다. 영화는 집안 사정으로 산골짜기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어린 도시 손자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생활방식과 세대차이에서 오는 짜증스러움을 애꿎은 외할머니에게 화풀이해 보지만, 대자연과 같은 외할머니의 사랑을 점차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지난해 신드롬 현상까지 일으켰던 <친구>처럼 <집으로...>도 거의 국민적 정서라 할 만한
'외할머니'라는 소재를 겁없이, 그러나 적절히 활용하여 적극적인 마켓팅과 눈부신 언론 플레이를 통해서 영화 흥행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처럼 부산을 떨어대고 있다.

물론 온통 조폭들의 피튀기는 쌈박질이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개그가 아니면, 엽기적이고
가학적이며 어이없는 슬랩스틱이 난무하는 가운데 <집으로...>와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비록 조재현이라는 배우에 기댄 탓이라 하더라도, <나쁜 남자>의 대중적 관심도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으며 <생활의 발견>과 같은 영화가 흥행면에서 비교적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후에 이어지는 '비교적' 비상업적인 영화의 흥행몰이이기에 이제 우리의 영화시장과 저변도 점차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해석도 가능할만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외할머니'와의 내 특수한 경험과 '외할머니'라는 보편적 정서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영화 <집으로...>가 상당한 완성도를 갖춘 가족용 영화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가족용' 영화라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고 보면, 더욱 그 가치를 인정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러나 나는 영화 <집으로...>를 관람하면서 많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의 원류는 외할머니와 관련한 내 특수한 경험이, 영화에서 묘사된 외할머니의모습이 너무 가혹하게 표현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데에서 기인하였고, 그것이 상업적이며 극적 감동을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되었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불편함은 불쾌함으로 변했다.

그렇게까지 외할머니를 가학해야만 했을까?

그렇게까지 외할머니의 모습을 추레하게 표현해야만 했을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우리가 '외할머니'의 사랑에 감동하고 '외할머니'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손자인 상우역을 제외한 모든 배우를 즉석 캐스팅으로 하여 타큐멘타리처럼 촬영하였다고

하지만, 영화 <집으로...>는 철저히 상업적인 영화이다. 비전문 배우의 즉석 캐스팅이나 타큐멘타리 기법을 차용한 촬영 자체까지 상업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상업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한 영화가 몇이나 되겠는가마는, 문제는 철저히 상업적인 영화이고
상업적인 마켓팅과 언론 플레이에 열을 올리는 영화가 '비교적' 비상업적인 영화로 찬양되면서 예술적 완성도까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집으로...>는 베스트 극장이나 TV문학관에서 방영하면 딱 어울릴 정도의 소재와 주제의식을 좀 더 예쁘장하고 그럴듯하게 필름으로 담아냈을 뿐이다.

영화 <집으로...>에 관객들이 몰리는 건 상업적인 마켓팅과 눈부신 언론 플레이 덕도 있지만,
더이상 조폭들의 설레발과 과장된 슬랩스틱을 관객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속도로 성숙된 관객들의 욕구는 좀 더 다양하고 신선한 영화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쁜 남자>, <생활의 발견>, <집으로...>로 이어지는 관객들의 행렬이 그 영화들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나쁜 남자>와 <생활의 발견>의 경우 김기덕과 홍상수가 자신들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써 왔던 코드와 서술방식, 주제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김기덕이나 홍상수의 영화를 처음 접한 관객이야 신선했을지라도, 그들을 계속 지켜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한계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 보였고 그들의 소위 '작가주의적' 영화의 정체를 회의하게 만들어 버렸다.

<쉬리>로 시작된 한국 영화의 중흥은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한국 영화의 관객층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그 관객층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엇비슷하고 고만고만한 복사판들을 양산해냄으로써 남들 다 보는 영화라니까 오랜만에 극장 한번 찾아온 관객들의 발길에 소금을 뿌려댔고, 이제 그 거품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가고 있다.

한국 영화의 진정한 발전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쁜 남자>, <생활의 발견>, <집으로...>와 같은 '비교적' 비상업적이면서 평론가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와 추종 일색이 아니라 좀 더 냉정하고 혹독한 비판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파이란님에게

영화2008. 4. 22. 01:19


사랑이 어려운 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사랑하려 하기 때문이며, 사랑이 어려운 건 내가 다치거나 상처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어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역시 사랑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이론과 실제란 역시나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으로 벌어져 있는 탓일까요?

봄가뭄이 길어진 탓인지 바람이 불면 덧쌓인 황사들이 날라다니면서 시야를 괴롭히긴 합니다만, 어느덧 해는 눈에 띄게 길어졌고 사람들의 옷은 저마다의 화사한 색을 뽐내며 많이 짧아졌습니다. 아직도 미처 겨울옷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옷장 속의 겨울옷들에게는 아직 여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계절은 무심하게 새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재촉합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이 또한 유난히 추웠지만, 이제 춥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이지요. 누군가의 가슴이 아무리 지독하게 황량하여 따뜻한 햇살이 도저히 살갑게 다가 오지 않더라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집니다.

아무리 두터운 겨울옷으로도 녹여주지 못했던 깊은 곳 얼음결정들에게 자연적인 화학반응이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이 단단하게 얼어 붙어 있던 깊은 산속 옹달샘에게도 아기 사슴이 찾아 와 목을 축입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건 절대로 변하지 않고 찾아듭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때때로 사람을 많이 무기력하게 합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우주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쳐져 버린 듯한 고독, 태양의 화염처럼 달아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있어도 지구는 여전히 그 낮과 밤을 번갈아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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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죽음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대의 죽음에 유일하게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법률상의 남편조차도 성가신 법적 절차로 인한 귀찮음의 의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대가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처음 그대를 만난 건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 <철도원>에 수록돼 있었던 <러브 레터>에서였지요. 거기에서 그대는 다카노 고로의 꿈 속에서 다카노 고로의 의식에 의해 변형된 채 잠시 등장할 뿐이고, 그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그리 길다고 할 수도 없는 두 장의 편지 뿐이었습니다.

어눌한 어투, 문법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서술, 단순하고 평이한 글일 뿐이었는데 그 편지를 읽다가 나는 그만 딱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어쩔 수가 없더군요. 울다가 괜히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습니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햇빛도 들지 않고 일 년 내내 장마철처럼 암울한 느낌만 드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대는 사랑을... 하셨더군요. '매일 잊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시더니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하고 '그래서 말만, 서투른 글씨로, 미안'해 하면서 '세상 누구보다 진심으로 사랑'을... 하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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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도 애절해서,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인 다카노 고로에게 질투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실낱같은 희망의 등불일 수도 있는 것인가 봅니다.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대의 죽음은 과연 얼마나 더 쓸쓸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대의 암울한 삶은 얼마나 더 절망적이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다카노 고로가 개같은 삶은 더이상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나의 절망의 나락은 그 끝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대가 사회적인 병균들에게 윤간당한 채 살해되고, 그 살인이 허울뿐인 제도와 법에 의해 파묻혀져 버렸지만 그대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사랑은 다른 어떠한 이념이나 이상이나 개뼈다귀같은 진리보다도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겨울 어느날 자주가던 극장 1층 로비에서 그대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무심결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러브 레터>라는 원제가 이미 동명의 다른 영화에 사용된 탓인지 그대의 이름인 파이란을 제명으로 하여 그대의 이야기가 영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꾸어서 최민식이 이강재로 이름을 바꾼 다카노 고로의 역을 맡고, 장백지라는 홍콩 배우가 그대의 역을 맡게 되었더군요. 캐스팅을 누가 담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처럼 딱 들어맞는 배역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포스터가 바뀌었습니다만, 예고편으로 걸려 있던 포스터에서 장백지가 분한 그대는 깊고 섬세한 눈을 지그시 뜨고 가늘고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어 하늘거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전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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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좋아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러다 보면 알량하게 축적된 지적인 허영이 정작 본질은 외면한 채 껍데기만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면서 분석한답시고 메스를 들이댑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영화를 가슴으로 보지 않고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바라보는 눈의 차원이 달라진 만큼 예전에는 걸핏하면 가슴을 두드렸던 감동의 횟수 역시 눈에 띄게 소원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를 보고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엉터리로 포장된 영화가 용서될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 누군가가 좋은 영화와 아닌 영화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왜 영화를 좀 더 깊이 알아갈수록 감동의 수는 줄어들어 가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된장찌개론을 예로 드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핏자나 햄버거를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쌀밥에 된장찌개가 더 좋아져 가는 이유는 핏자나 햄버거와 같은 인스턴트 식품보다는 된장찌개와 같은 갖은 양념에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들여진 요리에서 우러나오는 그 깊은 맛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영화를 보는 감동의 수는 줄어들지라도 그 영화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감동의 공명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무작정 분석하려 하는 것이 좋지 않은 습관이듯이 그렇다고 영화의 깊이를 재지 않는 것 역시 관객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객이 끊임없이 영화의 깊이를 재 줌으로써 영화는, 영화를 창조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성숙해져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돌아갔네요. 그대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나는 그대의 이야기가 영화라는 것으로 변형되었을 때, 원작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향기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랬으며 그렇게 손상된 향기탓에 내가 영화를 보면서 걸핏하면 드러내는 나의 못된 습관인 분석으로 내 시선이 기울어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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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영화 <파이란>에 대한 다른 누구의 글도 읽으려 하지 않았고, <파이란>의 시사회란 시사회에는 몽땅 응모하였으나 결국 시사회로 그대를 만나지는 못하고 극장에 개봉하는 첫 날에서야 겨우 그대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수놓아 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또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줄줄줄 흘리다가 영화가 다 끝나고 극장이 환해졌지만, 붉어진 눈자위를 숨기지도 않고 엔딩크레딧이 끝까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에 아무런 사심도 없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화 속으로 깊숙히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작과는 다르게 현실의 희망이란 결국 없다라는 냉소로 마무리짓고, 그대의 상황을 원작보다는 좀 덜 고통스럽게 설정해 놓았으며, 다카노 고로에서 이강재로 이름이 바뀐 캐릭터는 훨씬 더 사실적이며 훨씬 더 찐따같고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영화 <파이란>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대의 그 눈물겨운 사랑,
그대의 그 가슴아픈 사랑,
그대의 그 사랑하는 것 외엔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사랑,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보다 진실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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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지 오늘로 5일째가 되어 갑니다. 그동안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를 비디오로 빌려다 다시 봤고,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소설 <러브 레터>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길고도 깊숙하게 울려 오는 감정의 메아리를 조용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주 내내는 이 행복한 기분이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이 행복도 결국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테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행복합니다.

인생은 부침의 연속입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치열한 자기 반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대의 죽음으로 세상이 뒤바뀌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사랑은 계절이 왜 바뀌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의 삶도 조금씩 바뀌어 가겠지요. 그렇게 바뀌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대와 같은 사랑이란 그저 흔한, 아주 흔하디 흔해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이나 내세울 것 없는 신분, 혹은 종교적 인종적 사상적 편견에 서로를 가두어 둔 채 결국은 후회할 짓을 스스로에게 하고 마는 그런 사랑이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라서 아무도 그런 사랑은 하지 않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나른하게 감겨오는 봄바람이 너무도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대가 계신 그곳은 어떤가요?
더이상 슬퍼하지 않고 더이상 외로워하지 않고 더이상 미안해 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살고 계시겠지요?

부디 내내 평안하십시요.

이천일년 오월
그대를 사모하는 B.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빨딱 일어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벼가며 화장실로 갈 것인가, 아니면 배째라는 식으로 그대로 픽 꼬꾸라져서 갖은 죽는 시늉을 해가며 그날 하루를 농땡이 칠 것인가의 처절하다 못해 장엄한 기로에 서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똥을 싸고 밥을 먹을 것인가, 밥을 먹고 똥을 쌀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찰이 요구되는 갈등의 선택까지 매 순간순간 우리는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서서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우라지게 심각한 척 대가리 싸매고 고민해야만 한다.

그렇게 일상에서의 선택조차도 순간순간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가끔 우리는 우리가 전혀 원하지도 않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가령,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공중 화장실에 들어 가서 시원하게 볼일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일어나려고 하니깐 아무리 뒤집어 봐도 화장지는 없고 신문 쪼가리가 화장실 바닥에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놓여 있을 때 신문 쪼가리를 사용할 것인가 손꾸락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일생일대의 한계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 같은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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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에만 집중하란 말이다!

마틴 캠벨은 인생을 통털어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그러한 한계상황을 영화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이 영화가 지지고 볶고 넘어지고 깨지고 터지고 뒈지는 단순무식형 영화가 아니라 그래도 드라마적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박터지게 고민한 영화라는 걸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드라마적 내러티브는 아무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개가를 올리고야 말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카메라 웍, 도대체가 어디를 어떻게 CG로 사용했는지 알 수가 없는 마술같은 테크놀러지, 군더더기는 뭉퉁뭉퉁 잘라 버리고 관객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상황들만을 골라내는 탁월한 편집, 영화의 품격을 높여 주기 위해 빠지지 않고 삽입되는 유머, 거기에 블록버스터 영화의 터줏대감이 되어버린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은 2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을 준다.

이렇게 멋진 영화를 봤는데, 보는 동안 내내 저 눔의 시키들이 어떻게 저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돌파해서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를 지을 것인지 가슴 졸이면서 지켜 보았는데 왜 영화가 끝나자 마자 볼일보고 밑 안닦은 것 같은, 배터지게 처먹고 위궤양 걸린 것 같은 더부룩하고 뭔가 석연찮고 찜찜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 영화보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마스트 오브 조로>나 <007 골든아이>에서 여실히 입증했다시피 마틴 캠벨이라는 감독은 드라마적 내러티브하고는 담을 쌓은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이 양반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압솔롬 탈출>은 그러한 어줍잖은 내러티브를 막가파식으로 무시하면서 오로지 갑빠의 갑빠에 의한 갑빠를 위한 갑빠영화였기에 최소한 볼일보고 밑 안닦은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버티칼 리미트>도 그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봤어야만 했다. 하나씩 들추어 보면 이야기의 구성상 헛점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해서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지만, 같이 죽을래 하나만 죽일래의 어설픈 가족애로 시작해서 니들은 살리고 나만 죽을래의 억지 휴머니즘과 선악으로 대립되는 이분법에서 악은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강박증적인 마무리가 너무나도 진부해서 신물이 날 지경이지만 그러한 것에는 절대로 관심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그냥 롤러코스트 타는 것 처럼 짜릿짜릿한 영화다. 얼마나 짜릿짜릿한지 난중에 오줌이 다 지릴 지경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넘들, 마틴 캠벨이나 <아마겟돈>, <더록>의 마이클 베이나 <크림슨 타이드>, <베버리 힐스 캅>, <마지막 보이스카웃>의 토니 스콧(요즘 들어 많이 맛이 갔지만,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같이 뿅가는 영화를 만든 리들리 스콧의 동생이라서 그런지 <트루 로맨스>같은 역작도 만들기도 했으니 이 넘의 모든 영화를 싸잡아서 매도하기엔 좀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같은 넘들이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조금만 더 배려해서 되지 않는 드라마는 아예 배제해 버리고 좀 더 솔직하게 돈 벌려고 영화하는 거라는 거 인정한다면 좀 더 재밌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나 좋으냐? 니들은 돈 벌어서 좋고 나는 어설픈 드라마 땜에 볼일보고 밑 안닦은 것 같은 기분 안 들어서 좋고.


이런 경우 기분이 어떨까?

따사로운 봄햇살을 받으며 쫄래쫄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꼬마 녀석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구걸을 하고 있는 추레한 아줌마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종이쪼가리를 집어던지고 달아나는 것을 본다. 혈기방장한 열혈청년인 당신은 녀석의 4가지가 매우 불손하다는 것에 격분하여 녀석을 쫓아가 그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니가 그 아줌마를 모욕했으니 그녀에게 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4가지없는 그 녀석은 웬 떨거지가 별 시덥잖은 간섭을 한다는 태도를 보이며, 지가 몬 잘못을 했는데 사과해야 하냐고 오리발을 내민다. 속에서 천불이 치밀어 오른 당신은 녀석의 주둥이를 한 대 쥐어 박고 싶지만 가공할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눌러 참은 후, 오리발 내밀지 말고 그 아줌마에게 가서 사과를 하라며 아줌마가 있는 쪽으로 녀석을 끌고 간다.

아줌마 있는 쪽까지 녀석을 끌고 갔지만 가는 동안 녀석이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해대는 통에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 들고,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하게 된다. 우연히 그 녀석의 형의 여자친구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녀석의 오리발만을 믿고는 당신을 양아치 취급하면서 경찰에게 녀석을 변호한다.

혈기가 방장하기만 했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는 분기가 탱천해 오른 당신에게는 무리한 상황으로 사태가 번져 나가고, 혼란 중에 그 아줌마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것을 경찰이 데려와 보니 구걸을 하고 있던 길가에 있는 가게 주인은 매일 그 아줌마가 가게 앞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통에 가게 이미지가 좋지 않아졌다고 경찰에게 진술한다.

경찰은 가게주인의 인적사항을 적고, 당신의 말은 별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 녀석에게 가도 좋다고 말하고는 당신에게는 조사할 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한다. 이 어이없고 황당한 사태에 당신은 상당히 기분이 상해서 그렇게 끌지 않아도 내 발로 갈 터이니 잡아 당기지 말라고 경찰에게 말한다.

경찰은 자꾸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된다며 당신의 등을 떠민다. 내 발로 갈 터이니 밀지 말라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경찰 서너명에게 온 몸을 붙잡혀 경찰서까지 끌려 가게 되는 경우가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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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미지의 코드>는 위와 같은 사소하지만 부조리한 에피소드로 시작하여 그 에피소드에 얽혀있는 사람들의 삶을 무작위적으로 추출하여 보여준다. 혈기방장한 열혈청년은 아랍계 흑인 이민자 2세이고 구걸하고 있던 아줌마는 루마니아 출신의 불법체류자이며, 종이쪼가리를 구겨 던진 꼬마 녀석은 촌구석에서 농사나 짓고 있는 어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언제든 촌구석을 탈출하려 하고 있고 꼬마 녀석의 형은 전쟁터를 오가며 사진을 찍는 전쟁사진가이며 그 형의 여자친구는 영화계 데뷔를 앞두고 있는 신인 연기자이다.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구걸하던 아줌마와 그녀를 보호하려 했던 열혈청년이 불법체류자와 흑인 이민자 2세라는 사실로 위 에피소드의 부조리함이 왜 발생되었는지 설명되었지만, 영화는 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서로의 갈등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그리고 그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영화는 각각의 삶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스쳐 지나가는지, 그들의 삶속에는 또 각자의 부조리가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일상화된 그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를 별다른 기교나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툭 툭 내던지듯이 나열해 보여줄 뿐이다.

그 나열의 리얼리티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미하엘 하네케는 하나의 씬(장면전환이나 시간의 경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씬이 바뀐다고 한다)을 컷(감독의 의도에 따라 샷을 분리하여 배열한 편집상의 개념)을 나누지 않고 하나 혹은 기껏해야 두 개의 샷(필름 레코딩을 시작하여 중단할 때까지를 하나의 샷이라고 한다)으로만 보여준다. 그래서 모든 씬은 롱테이크로 촬영되었고, 엄청난 분량의 롱테이크가 간혹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 치밀한 연출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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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는 언제나 그렇듯이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퍼니게임>과 <피아니스트>가 그랬듯이 <미지의 코드>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불편함을 얹어 놓고는 그 불편함을 해소할 아무런 단서도 어떠한 해결책도 주지 않고는 생뚱맞을 정도로 급작스럽게 끝맺어 버린다.

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가 매우 거북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색다른 시각이 주는 재미를 만끽할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그의 영화에서 독특한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새삼 <퍼니게임>과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증오>, 이 두 영화가 나에게 주었던 정신적 충격이 떠오른다. <지옥의 묵시록>과 <아마데우스>가 나에게 영화의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었다면, <퍼니게임>과 <증오>는 나에게 영화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었었다.

그러나 <증오>의 마티유 카쇼비츠가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프랑스산 블록버스터 <크림슨 리버>로 예술적 성취는 실종된 채 영화적 기교만을 난삽하게 너질러놓아 나를 극도로 실망시키더니 헐리웃에 입성하여 내 놓은 첫 작품 <고티카>에서는 자신의 독특한 영화적 기교마저 그저그런 여타의 구닥다리 오락물과 뒤섞어버림으로써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깨닫게 해 준 반면, 미하엘 하네케는 <미지의 코드>와 <피아니스트>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만의 영화적 가치를 추구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되니 씁쓸한 기분과 함께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작품인 <늑대의 시간>과 <히든>을 아직 관람하지 못했고 최근에는 자신의 작품 <퍼니 게임>을 영어판으로 리메이크했다는 데 그것 역시 기대되기는 하지만, 아직 관람하지 못하여 그의 영화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음 작품이 무엇이 되었든지, 언제 그것을 보게 되든지, 가슴 떨리는 기대를 갖게 하는 감독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저녁식사를 하다가 티비에서 흘러 나오는 '게릴라 콘서트'라는 걸 보게 되었다. 엠비쑤 일요일 일요일 밤엔가 하는 프로프램의 한 코너로 방영되는 것인데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거였다. 그게 꽤 인기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이 티비에 쏠려 있었고 같이 식사를 하던 친구도 식사하는 내내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치고 그 코너가 끝날 때까지 티비 이외의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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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콘서트'란, 콘서트가 그날 아침에 결정되어서 예정된 시간(보통 한시간 정도) 만큼만 홍보를 해서 관객들이 5000명 이상 콘서트를 보러 오면 공연을 계속 하고 그 이하면 공연은 하지 않고 와 준거 고맙다며 얼굴만 보고 마는 그런 거였다.

물론 짜고 치는 고스톱이겠지만, 어쨌든 티비에서 보이는 바에 따르면 콘서트가 어디서 열리는지는 그날 아침에 결정되고 그 콘서트의 주인공인 '뮤지션'은 거의 발로 뛰당기면서 자신의 콘서트를 홍보해야 한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콘서트를 홍보해야 하기 땜에 주인공은 5000명 이상의 군중들이 몰려 들게 하기 위해 정해져 있는 시간인 (지난번에 보니깐 어떤 '뮤지션'의 경우엔 신인이라는 이유로 하루라는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한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홍보해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그 '뮤지션'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공연을 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느라 티비 카메라는 똥줄이 빠지게 그 '뮤지션'을 쫓아 다녀야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홍보로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콘서트를 시작할 시간이 오면 그 '뮤지션'은 심판받는 심정으로 안대까지 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 관중들이 몇 명이나 왔을지를 질문받는 가운데 과연 콘서트를 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냐의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리고 티비 화면은 몰려든 관중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를 좀체로 쉽게 알려 주지 않고 중간에 다음 코너의 예고까지 낑궈 넣는 알뜰함을 과시한 다음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토록 애타게 만들던 숫자에 대한 강박증은, 막상 그 숫자가 공개되자마자 사라져 버리고 이제 5000명이 넘든 안 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관객이 몇 명이 왔든지 그 주인공 '뮤지션'을 보러 온 팬들에게 그 주인공 '뮤지션'은 감동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격해 하고 그 감격이 거기에 몰려든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감정이입되느냐에 따라 그 프로의 시청률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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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주인공이었던 '뮤지션'은 N세대 탤런트라는 차태현이라는 넘이었다. 018 CF에서 코믹한 캐릭터로 단숨에 CF계의 기린아가 되더니 이후 몇 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아이돌 스타로서의 발판을 굳건히 마련한 그 차태현이 이제 '뮤지션'으로 데뷔하겠다면서 곧 있을 음반 발매에 맞춰 '게릴라 콘서트'를 연 것이었다. 음반 발매전에 팬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먼저 콘서트를 통해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뭐, 차태현이가 그동안 자신의 음악적 숨은 재능이 엄청나게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탤런트로서만 알려진 것이 못마땅해서 '뮤지션' 데뷔를 선언한 것인지도 모르고, 5000명 이상 모으기가 전에 볼 때는 무지 어렵더만 이번에는 단숨에 만명이 넘은 관중들이 몰려든 '게릴라 콘서트'에서 정작 차태현이 공연을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서 그가 어떻게 공연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의 음악적 역량을 내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 '게릴라 콘서트'라는 것이 진행되는 내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들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면서 아랫배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아니꼽고 오장이 배배 꼬이는 역겨움을 참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이 넘들은 콘서트라는 걸, 음악에 있어서의 공연이라는 걸 뭘로 아는 것일까? 이 시방새들은 음악에 목숨을 걸고 평생을 음악 하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수많은 뮤지션들의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개구리 코털에 묻은 콧물 만큼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뮤지션들이 오늘도 공연할 장소는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지 상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이 개쉐이들은 왜 이다지도 음악을 모독하는가?

이것은 죄악에 다름 아니다.
정당한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댓가가 주어지지 않는 방정맞은 사회 속에서 그래도 어딘가에는 희망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조또 없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건 몽조리 개소리이고 그들의 허접스런 머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시방새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러한 숫자놀음으로 우매한 대중들에게 싸구려 감동을 던져줌으로써 희망 자체를 산산히 부숴버리는 죄악이다.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그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전신을 파들파들 떨면서 안식을 구하려고 찾아든 극장에서 마티유 카쇼비츠는 나에게 넉다운 펀치를 날려 버렸다.

마티유 카쇼비츠....
내 젊음의 한 쪽을 송두리째 집어 삼켜버린 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전율을 느낀다. <증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심근경색발작증후군같은 쇼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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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그것이 끝날 때까지 침 한번 꼴깍거리지 못하고 넋을 잃은 채 무아의 경지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만큼 유쾌한 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영화가 끝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뒤로 돌려 놓고 싶은 심정이 되는 영화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 마티유 카쇼비츠는 기존의 영화에서 보여지던 구태의연하고 지리멸렬한 진부함에 허구헌날 하품이나 쩍쩍 해대던 나에게 전혀 색다르고 독특하며 감각적이고 놀랄만한 신선함을 던져 주었다.

소수민족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갖는 방황, 분노, 저항, 갈등, 소외, 그리고 증오의 문제들이 다큐멘타리같은 흑백화면 속에서 갖가지 영화적 기교로 표현된다. 인물의 행동 선상을 따라 거친 핸드 헬드로 담아내는 샷의 엄청난 롱테이크들은 웬만한 내공의 연출력으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장엄하며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나를 완전히 뻑가게 만든 샷은 도시를 배경으로 다리 위에 서 있던 위베르 일행이 길고도 지리하며 혼란스런 밤이 끝나가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면서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상황에서 오는 불안과 부조화를 대변하듯 펼쳐진 줌 인 달리 아웃 샷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의 정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은 그대로 있는데 주변의 사물들이 급격하게 굴절되면서 변화되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런 장면을 만들어 내는 카메라 웍이 줌 인 달리(혹은 트랙이라고도 한다) 아웃이다. 말 그대로 줌으로 당기고 달리는 뒤로 물러 나는 것이다. 거꾸로 줌 아웃 달리 인을 해도 효과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보통 인물의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표현할 때 이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게 간단하게 말로 표현한 것 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달리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줌을 당기면서 포커스를 맞추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카메라 웍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핀트가 나가 버린다거나 화면이 툭툭 끊겨 버리기 십상이다.

개연성을 가지고 적합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얼마나 적절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영화적 기교는 그 가치가 극대화됨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기교 자체가 영화 자체의 완성도로 착각하고 있는 꼴통들이 가끔씩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줌 인 달리 아웃을 시도하는 넘들 때문에 영화의 쉣스러움이 줌 인 달리 아웃으로 배가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줌 인 달리 아웃 샷 중에서 <증오>에 등장한 것 만큼 완벽하게 그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영화적 기교의 의미를 절절히 확인시켜준 것도 없었다.

<증오>를 통해서 나를 경악시킨 마티유 카쇼비츠는 <암살자(들)>을 통해서 <증오>가 27살 새파란 애송이의 자기 껍질 벗기기식 관념의 과잉이나 기교의 허풍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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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블록버스트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어냐?"라면서 <크림슨 리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이며 질시어린 눈초리에 가볍게 콧방귀 뀌어버리는 카쇼비츠의 믿음직한 눈망울에서 고래심줄같은 신뢰감을 가졌더랬다.

또한 갖가지 게시판에 도배되고 있는 <크림슨 리버>에 대한 평가절하식 발언들에 대해서도 니덜이 아무리 카쇼비츠를 음해하려 하여도 예술적 완성도는 반드시 음지에서만 이루진다는 편견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넘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렸더랬다.

그런데...

그토록 믿었던 카쇼비츠이건만...

<크림슨 리버>는 헐리웃 블록 버스터의 공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잘 만든 헐리웃 블록 버스터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나은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구나 세계 시장을 겨냥한 탓인지 영어로 주어 섬기는 대사는 불어의 억양을 그대로 가지고 떼떼거리는 통에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그러한 어색함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상시키는 엉뚱함을 불러올 정도로 비극적이다.

영화가 망가지게 되니까 사소한 것까지도 도대체 통제가 안 되는지, 주 조연은 물론이고 엑스트라들까지 생동감이 넘쳐 흐르던 <증오>에서의 치밀한 연출력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크림슨 리버>에서는 엑스트라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는 조연들까지 꿔다 논 보릿자루가 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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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나를 격노시킨 것은 줌 인 달리 아웃 샷이었다. <크림슨 리버>에서는 줌 인 달리 아웃 샷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그것이 영화적 완성도를 위한 영화적 기교의 적절한 배합이 아니라 카쇼비츠에게 남아 있는 재능은 줌 인 달리 아웃의 영화적 기교 밖에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죄악이다.
얼마나 많은 영화학도가 쿠엔틴 타란티노와 마티유 카쇼비츠의 입지전적 성공에 고무되어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상업성과 반비례하지 않다는 것을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카쇼비츠는 입지전적 성공 뒤에는 퇴락한 재능과 결탁한 탐욕의 혀가 널름거리고 있고, 상업성을 위해서는 예술적 완성도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수 많은 실례 중에 하나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산산히 부숴 버리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차태현이 음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마티유 카쇼비츠가 블록 버스터를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왜 음악을 모독하는지,
왜 믿음을 배신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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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넘나드는 액션과 상상력의 테크니션

인간은 다만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재배되고 실존하는 모든 것은 다만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이라는 어디선가 들어 봤음직하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상상력을, 무협지와 드래곤 볼, 홍콩의 무협영화와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갖가지 플롯과 기교와 소재들을 뒤섞어서 헐리웃의 자본과, 눈을 현란하게 하는 테크놀러지로 제작된 와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를 보고 나오면서, 같이 영화를 봤던 친구 녀석은 입맛을 쩍쩍 다셔댔다.

<매트릭스>는 종횡무진 쟝르를 넘나들면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처럼, 기교면에서는 가히 일가를 이루었음을 의심할 수 없는 헐리웃에게 좀 더 신선한, 어쩌면 좀 더 능숙하게 기교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긴 하지만, 종반부에 이르러 상황이 역전되는 과정에서 <제 5원소>의 악몽이 떠올려지자 다소의 실망스러움을 감추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매트릭스>를 꽤 재밌게 봤다. 재밌는 건 잼있는 거니깐.

하지만 친구 녀석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작한 그의 헐리웃에 대한 공격은 어느새 우리의 대중가요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처음에는 댄스뮤직에 대한 일반적인 공격에서 시작되더니, 그런 음악을 하는 (그 친구의 표현대로라면 그런 막돼먹은 개날라리들의 춤판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심한 욕설로 발전하더니 마침내는 그런 음악이 우리의 음악계에서 번성하고 있는 이유가 그런 음악에 미쳐서 날뛰는 무지하고 가련하고 넋빠진 대중들의 탓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의견에 공감할 수 없다. 나는 S.E.S.나 핑클, H.O.T.나 젝스키스가 어떤 노래를 가지고 립싱크를 하면서 춤을 추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조차도 잘 모른다. 그들에게 곡을 써 주고 엄청난 자본으로 밀어주고 있는 이들이나 그들 자신들도 물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며 그들의 음악 역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음악의 종류가(댄스뮤직이라는 쟝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댄스뮤직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적 노력이나 멜로디나 가사가 있다면 나는 그것도 좋아한다.)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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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덜이 먼 죄가 있겠냐?


나 역시 하등 다를 것 없는 인간이기에 그 친구를 평가절하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처럼 대중적인 예술의 무가치성에 대해 열을 내는 소위 매니아들이 과연 얼마나 매니아다운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매니아들은 입만 매니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부산 국제 영화제나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에서 밤을 지새며 장사진을 이루는 그 많은 매니아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이광모나 키아로스타미, 타르코프스키는 고사하고 그나마 실험적인 재미라도 있는 홍상수나 마티유 카쇼비츠,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들도 극장에 간판을 오래 걸어두질 못한다.

우리의 매니아들은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이 보지 않는 것, 남들이 듣지 않는 것을 하고 보고, 듣고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다만 남들과는 다른 것을 즐기고 있다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그 다양성을 고루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을 탓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스스로 매니아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매니아로서의 의무, 혹은 권리를 극대화시킨다면 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대중예술로 우리의 문화도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TV를 통해 '막돼먹은 개날라리들의 춤판'만을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지들끼리 나눠먹는 잔치가 영 달갑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기에 의식을 하고 보고자 했던 건 아니었는데, 잠들기 전에 티비나 좀 볼까 채널을 돌리다가 딱히 볼만한 게 없길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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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쯔이의 우아한 자태

<와호장룡>이 몇 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으니 혹 장쯔이의 자태라도 함 비칠까 하는 바램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바라던 장쯔이의 자태는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오스카 트로피가 이 시대 최고의 영예인양 호들갑을 떨어대는 수상자들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감독상을 수상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멘트는 인상적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일일히 찾아가 인사할 것이고, 이 자리에서는 창조적인 작업을 위해 매진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책, 영화, 음악, 미술, 사진, 춤 등등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그러한 창조적인 작업들에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과의 교감이 없었다면 삶이 이처럼 풍성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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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놈 스티븐 소더버그

정확하게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이런 요지의 수상소감이었다.

우리가 소위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접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바로 이런 교감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떠한 예술 속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교감은 단순히 감각적 쾌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정신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고와 인식의 깊이를 변화시키고 때때로 지금까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인생관까지도 재고케 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의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사회적 폭력을 유발시킨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 인간의 행동 동기를 두고 예술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었다. 결국 예술은 인생의 재구성일 뿐이지 인생을 창조하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견해가 다르다. 나는 궁극적으로 예술은 인간 행위의 동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영향을 인간의 의식에 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 속에서 우리가 주제를 찾고 철학을 부여하고 예술가의 인생과 경험과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에 공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만 그 예술 속에서 말초적인 자극만을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말초적인 자극만을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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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꼴통? 깝죽대다간 죽는 수가 있다~잉

감각적인 테크닉 면에서 가이 리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듯 하다. <스내치>는 전작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보다 스타일과 기교면에서는 훨씬 더 화려해지고 훨씬 더 교묘해지고 훨씬 더 치밀해졌지만, 그와 비례해서 훨씬 더 시시해져 버렸다.

사실 <저수지의 개들>의 시나리오에 <트래인스포팅>의 기교를 혼합해 놓은 잡탕찌개같은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도 시시하기는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런 아류라도 신선함이 약간은 느껴질 수 있었던 3년 전이었다. 그런데 무려 하나의 밀레니엄이 뒤바뀐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포장만 다르게 한다고 해서 여전히 신선할거라고 믿었다면, 관객을 과소평가했거나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가 아류의 한계를 넘지 못한 건 스타일과 기교만이 영화의 전부라고 착각한 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스내치>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치기어린 농담처럼 툭툭 내던지는 스타일과 기교로 1시간 40여분의 러닝 타임을 때우고 있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사건들을 잔뜩 풀어 놓은 다음 그것을 해결하려다 보니 또다른 사건들이 잔뜩 꼬여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듯 보이게 하여 대단히 치밀하고도 정교한 구성같아 보이지만, 그 시나리오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온통 조잡한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순전히 우연으로 사건이 꼬여졌다가 순전히 우연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우연을 스타일과 기교로만 가려 보려고 하니 그 꼴이 어찌 한심해 보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스타일과 기교의 단순성을 단순무식하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반전이라는 걸 낑궈 넣어 봤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전은 반전의 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또한 엉성한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극단적으로 희화화되어 있는데, 캐릭터의 극단적인 꼴통화는 그 캐릭터를 통해서 냉소적인 똥침을 가할 수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지 꼴통을 위한 꼴통화는 비사실적인 괴리감에서 빚어지는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저수지의 개들>이나 <트래인스포팅>과 그 아류인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의 차별점이다. 시각적인 터치건 청각적인 굉음이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쾌감이 그 쾌감 자체로 끝나지 않고 관객과의 '교감'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냉소적인 똥침'으로라도 정신의 영역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단순히 스타일과 기교의 나열에 그친다면,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환상적이고 정교하며 화려한 영화적 기교에 감탄을 연발했지만 정작 그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니덜, 꼴통이라고 깝죽대는데 진짜 꼴통한테 까불다간 죽는 수가 있다'라는 덜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영화학교에서 습작할 때나 써먹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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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돌아오지 말지 그랬니.

수천만년 전 공룡이 부활하고 복제양 돌리가 탄생한 것을 직접 목격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DNA라든가 인간 복제는 생소한 용어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퀸 에이리언과 동반 자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진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숭고하기까지 한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리플리의 부활에 리얼리티를 부여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서 리플리는 부활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쟝 피에르 쥬네의 에이리언에게서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에게서 보였던 미래와 미지에 대한 광포한 불안과 공포도 제임스 카메론의 에일리언에게서 보였던 인간의 폭력성과 비인간적 전쟁의 신랄한 비판도, 심지어 데이빗 핀쳐의 에일리언에게서 보였던 인간존재의 존재론적 물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같을 수야 없겠죠. 쥬네의 에이리언은 다르니까요. 어쩌면 그는, 혹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에이리언에게서 인간복제의 문제와 인간다움의 문제를 제시할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에이리언이라는 캐릭터는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적 일면이 빚어낸 미지이며, 종족의 이질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본성에서 출발한 캐릭터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수태시켜 준 퀸 에이리언의 턱을 한방에 박살내 버리는 변종 에이리언이 리플리에게서만은 모성애를 느낀다는 건, 인간다움의 문제를 가장한 또 다른 독선이며 전횡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 리플리는, 우리 인간족속은 다른 족속, 에이리언이든 변종 에일리언이든 그 존재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걸까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구요? 어쨌든 우리부터 살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구요? 인간족속이 먼저 존재할 수 있는 한에서 다른 존재도 존재하는 것 아니냐구요? 글쎄요... 다시 우스꽝스런 캐릭터의 문제로 돌아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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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었겠니?

쥬네의 에이리언은 다리우스 콘쥐의 현란한 카메라 테크닉과 놀랍도록 정교해지고 사실적인 특수 효과에도 불구하고, 엉성한 시나리오 덕에 오히려 재능있는 감독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축시킨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다시 머리를 드는 생각은 헐리우드 메이저, 혹은 상업주의와 대결한 예술 정신의 패배라는 혐의입니다. 역시 그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우선은 성공하고 봐야 하는 걸까요? 우선은 영화가 살아 남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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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 다시 찍으면 죽는다!

지난 2000년 새해 벽두부터 <박하사탕>이라는 걸작으로 시작하여 <오! 수정>, <공동경비구역 JSA>,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의 유난히 많은 한국 영화들이 한국 영화의 절라 장미빛스러운 미래를 예상케 한 반면, 수많은 쉣덩어리 한국 영화들이 한국 영화의 앞날이 그처럼 뽀사시해지는 것에 사정없이 고춧가루를 뿌렸더랬다.

그 수많은 쉣덩어리들 중에서 그 쉣스러움의 내공이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무비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찍히면 죽는다>였도다. 항간에 떠도는 바로는 이 영화을 만든 스탭들이 이 영화을 본 몇 되지 않는 관객들(그나마 대부분이 공짜 시사회를 통해서 보았다고 하는데)의 처절한 저주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그 저주의 핵심은 '이런 영화 다시 찍으면 죽는다'였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영화의 가공할 쉣스러움에 오랜동안 정신이 혼미해지고 실어의 증세에 시달렸는가 하면, 공짜 시사회니깐 재밌게 보자고 꼬셔간 여자친구에게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고 한 대 더 맞은 다음 길거리에 혼자 내팽겨쳐져 버리는 참혹한 내상을 입고야 말았다. (하늘도 무심하신지 그날은 정말 비까지 내렸다.)

그런데...
그런데 이럴수가!!
<찍히면 죽는다>의 쉣스러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내공으로 무장하고 <찍히면 죽는다>의 펜티엄급 황계무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황당무계로 업그레이드된 무비가 <찍히면 죽는다> 이후 6개월만에 등장하였으니....

두둥!!
그 이름하여 <7인의 새벽>이라는 초절정 하이 넌센스 울트라 쉣파워 지랄 옆차기 무비가 바로 그 주인공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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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공할 초강력 쉣아우라를 보라!!

돈 내고 보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보는 시사회에서 그러면 정말로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영화 시작하고 딱 5분이 지나면서 궁둥짝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자꾸만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산만함이 점층되면서 금연한답시고 흡입하지 않고 있는 니코틴을 간절하게 갈망하는 타는 목마름이 내 폐를 쿡.쿡.쿡. 찔러대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영화가 시작한지 한시간이 채 되기 전에 극장문을 나서고 말았다.

시사회 시간에 맞춰 가느라고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파파이스에서 햄벅과 콜라로 대충 때우면서도 솔직히 이 영화가 훌륭한 건 그만두고라도 킬링타임용 재미라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노랑머리>와 <삼양동 정육점>을 제작한 얘덜이 제작한 거니 어설픈 컬트 흉내 쫌 내다가 죽도 밥도 아닌 이야기 질질질 끌고 가서는 이런 영화 전에 함 본 적 있냐 메롱~ 하는 식일 거라고 미리부터 단단히 마음을 다 잡아 먹고, 그저 공짜니깐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심정으로 보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을 했더랬다.

그러나 아~ 허무할손 그러한 굳은 다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강력한 쉣스러움의 공력은 너무나도 막강하여 나같은 쪼무래기는 단 일초식의 장풍으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였던 것이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이후 이 무비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쉣스러움에 끝까지 대적해 보지도 못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해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길래 내가 이렇게 전율을 금치 못하느냐는 쓸따리없는 호기심이 주체할 수 없이 방방방 떠 올라 이 영화를 보려는 자가 있다면 제발 다음의 딴지 영진공 한동원 옵빠의 경구를 새겨 듣길 바란다.

그런 식으로 돈을 낭비하는 건
'백만원짜리 수표로 코딱지 후비고, 그걸 리무진에 실어서, 747 전용기로 공수하여, 남극점 지하 10km 지점에 매설, 폐기처분 하는거 보다 약 248.75배 더 사치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실화가 특기할만한 역사적 소재임에도 영화속에서 그 역사적 소재는 단지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래서 역사는 우리네 평범한 보통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철학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한 그 철학적 근거 때문인지, 한두명의 주연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의해-비록 만족스러울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하지만- 영화가 완성되어지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나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화려한 휴가>를 보는 내내 나는 연신 불편한 자리를 고쳐 앉고 지루하고 따분한 나머지 잠시 딴생각에 빠져드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의 생뚱맞은 대사에 어이없음의 실소를 픽픽거리고 마침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시민군과 공수부대의 도청전투씬에 이르러서는 깜박 졸기까지 한 반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유쾌하게 박장대소하다가 불현듯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는가 하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하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가슴속에서 공명하는 감동의 여운을 남김없이 즐겼다.

<화려한 휴가>의 가장 큰 패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 광주를, 비록 제작진은 정반대로 의도하였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어디 먼나라 과거의 가슴아픈 비극쯤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여졌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5.18 광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속이 뻔히 들여다 뵈는 짓거리이긴 하지만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5.18묘역을 방문하고, 사람들은 5.18 광주가 독재에 의해 짓밟힌 민주화의 정신이며 우리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18 광주의 진실은 아직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 희생과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들이 짐지고 있는 실정이다.그때의 가해자들이 그 희생과 고통을 똑같이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에 따르는 진심어린 사죄와 경우에 따라서는 응당 치러야 할 법적, 사회적, 도덕적 처분을 달게 받음으로써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수많은 피해자들의 눈물과 한숨 생까기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듯, 우리는 5.18 광주의 진실을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5.18 광주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5.18 광주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진실에 어떤 시각으로든 접근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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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숑과 써쑤펜수나 끝까지 쭈-욱 지키지, 좀...

그러나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의 '진실'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5.18 광주의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진실'이 실종된 영화는, 사람의 두피를 도끼로 벗겨내는 게 취미인 절대악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 수 밖에 없는 절대선 백인들 간의 서부 활극처럼, 명백한 선악의 대립구도속에서 액숑과 써수펜수와 총격전이 난무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차라리 액숑영화의 본분을 지켜 살떨리는 써수펜수를 쭈-욱 유지시켰으면 그나마 봐줄만 하련만, 어줍잖은 유머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최루성 신파멜로까지 우걱우걱 낑궈놓았으니 어느새 영화는 황량하고 거친 산 위에 올라 종잡을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감동적이지?

거금 8천원이 아까와서 무거워진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치켜뜨며 저항했지만, 어느새 깜박 졸고 말았던 나는 퍼뜩 놀라 얼결에 대답한다.

"딸꾹-"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감동적인 건 삶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감독 임순례가 자신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천착했던 것 처럼, 삶이란 피폐하고 남루하며 고역스럽고 불가항력적으로 악순환되는 것이고, 감당키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는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침묵하다가도 바락바락 악도 쓰며 아무래도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수렁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그 삶의 어딘가에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이, 지금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도록 우리를 지탱해 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임순례는 그 '진실'을 전작들에서 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고 알기 쉬운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비록 상업성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후퇴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듣자니 경제적으로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비흥행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은 그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신의 색깔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 역시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역전에 동점, 재역전에 다시 동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2차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결국 승부 던지기로 은메달에 머물렀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로 재구성되었기에 스포츠영화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승리만이 감동을 준다는 승리지상주의를 교묘하게 벗어나면서도, 중요한 것은 승부나 그  승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승부에 임하기까지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세라는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고단하고 짜증스러우며 도대체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삶 속에서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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