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무섭고 엄하셨다는 기억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친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돌아가셨고, 나에게 있어 할머니라는 가슴 아픈 명칭은 온전히 외할머니에게서 비롯된다. 유아식 분유는 커녕 너무 빨아대서 어머니의 젖가슴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빈곤했던 시절, 연년생이었던 탓에 유일한 생명줄을 너무 일찍 빼앗겨버린 나는 하루 종일 빽 빽 울어댔다고 한다.

왜 우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 생명은 그저 배고픔을 참아할 수 없어서 목이 쉬어 가고,
그 어린 생명의 소란스러움을 당신의 등에 짊어지고 종일 종종거리시다가 밥알을 으깨어 물과 함께 먹이면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는 어린 생명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으시던 분이 내 외할머니였다고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따뜻함 탓이었는지 나는 유난히 외할머니를 따랐다.
어린 남매를 남겨 두고 외할아버지가 전쟁통에 실종돼 버리신 이후 평생을 농사일과 자손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 밖에 모르고 사신 외할머니는 병약한 아들과 철없는 딸이 늘 눈에 밟혀 두 집을 오가시며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배고픔에 종일 빽빽거리는 첫 외손자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 사랑에 보답하려면 할머니를 업고 지구를 한바퀴 도는 유람을 해 드려도 모자랄 터이지만,
아직도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주시는대로 받고만 있고 철없던 때에는 그것이 얼마만한 희생이며 사랑인지 깨닫지도 못했었다. 이유없이 강짜부리기, 공연히 투정하기 정도는 할머니에게는 그저 귀여운 어리광으로 비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내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불효막심했었는지 손톱만큼 정도만 깨닫고 있다.

할머니의 성품을 거의 그대로 물려 받은 외삼촌은 술, 담배는 물론이고 가정과 일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고 남에게 화를 낼 줄도 다툴 줄도 몰랐다.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고지식함은 융통성없음으로 선량함은 바보같음으로 너무나 쉽게 왜곡되고,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호의적이지도 않다. 고지식함을 조롱하고 선량함을 이용하는 세상은 외삼촌의 삶을 버겁게만 했고 누구에게 불평할 줄도 모르는 그는 그 모든 고뇌를 안으로 안으로만 삭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이 불행의 그림자는 그런 사람에게 더 쉽게 찾아온다.
불혹을 갓 넘긴 한창 나이에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여의 처절한 투병과 가족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끝내 생을 달리하던 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고스란히 통곡으로 나타내고 있는 내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시며 할머니는 석상처럼 침묵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내 어찌 백만분의 일이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만, 슬픔이, 그 도저한 슬픔이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어지게 되면 눈물마저 메말라 버리고 일시적 실어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나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전형적인 유교적 가부장제가 뿌리내린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자란 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잘것없는 권위와 부조리한 위계에 길들여져 있었고, 그것의 부당함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될 정도로 머리가 커지면서 나 자신의 극렬한 모순과 불합리한 행동 양식에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반항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내 안의 파시즘을 극복하려는 과정은 내 가정 안의 파시즘을 거부하려는 버둥거림으로 발전하여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어느날 현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대치되어 더이상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하였을 때, 할머니는 내가 양보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셨다. 할머니의 바람은 고성과 반목, 저주와 냉랭함으로 균열되는 가정이 화해와 평화로움으로 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할머니는 그것을 순종과 양보로 이루길 바라셨고, 내 신념은 부조리한 강압에 의한
일시적 평화가 결국 더 깊은 상처만을 남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었던가! 어쨌든 나는 당시의 내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출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였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만배사죄하여도 씻을 수 없는 죄악을 할머니에게 자행함으로써 할머니의 여린 가슴을 찢어 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떠난 이후 한끼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다는 할머니는 병색이 완연한 몸을 벌떡 일으켜 내 손을 어루만지시며 다시 석상처럼 침묵하셨다. 왜소하신 체구가 더욱 왜소해지신 할머니의 물기어린 눈을 바라보았을 때만큼 혀를 물고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을 정도로 자신이 미웠던 적도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가끔 서울 근교 비닐하우스로 밭일을 나가신다.
아무리 가족 모두가 이제 그만 나가시라고 해도  당신 평생에 유일하게 재미를 붙이면서 하시는 일이니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너무 심심해서 좀이 쑤신다고도 하시고 그렇게라도 바깥 바람을 쏘이시는 것이 오히려 할머니의 건강에 더 좋다는 판단에 이제는 할머니의 밭일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벽부터 하루종일 비닐하우스 안에서 쪼그려 앉아 밭일을 하시는 할머니가 늘 걱정도 된다.

밭일을 가지 않는 날이면 집앞 쓰레기 치우는 일이며 빨래며 집안 청소며,
동생의 두 돌 지난 첫 증조외손자 돌보는 일이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때때로 할머니가 그나마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 건 늘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즐거이 하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연세가 연세인 만큼 할머니의 건강이 항상 염려된다.
  
며칠전 퇴근후 집에 와서 할머니의 방에 인사드리러 들어가 봤더니, 그날따라 많이 핼쓱해진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평소 내가 가면 반가이 맞아 주셨는데 그날은 실눈을 뜨고 나를 보시는데 눈가에 눈물자욱이 선연하고 눈도 잘 뜨지 못하셨다. 더럭 겁이 나서 어디 편찮으신건 아닌가 싶어 이것저것 여쭤보면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앙상하고 주름지고 거칠거칠한 손.

그 손을 잡을 때마나 나는 한없이 밀려드는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을 느낀다.

"자꾸 눈이 가렵고 눈물이 나."

언제부터 그랬냐니까 이틀전 정도부터란다.

"이제 그만 안양으로 가고 잡프다. 거기서 며칠 살다가 가야지."

안양은 외삼촌의 식구들이 사는 곳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지만, 꾹 눌러 참고
그런 말씀 하시지 말고 병원에 가서 진료받으면 나아질 거라고, 눈 주위에 뭔가가 나서 그런 거 같다고, 마음 약하게 먹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중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할머니를 와락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물론 언젠가는 할머니를 보내 드리게 되겠지만, 아직도 나는 할머니가 없는 내 삶이
상상되지도 않고 만일 할머니를 보내 드려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더더욱이나 상상되지 않는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
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나는 늘 할머니를 생각한다. 이제 와서 하면 뭐 하느냐고, 없어도 불편한 줄 모르겠다고 끝내 고집하시는 바람에 앞니 하나가 빠진 채로 지내고 계시지만, 그 모습으로 웃으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참 행운아라고, 아직도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얼마만한 복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복을, 그 사랑을 만분의 일이나마 돌려 드려야겠지만, 아직도 나는 돌려 드리는 것보다
받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항상 죄스럽고, 그래서 항상 행복하다.


최근 영화 <집으로...>가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면서 흥행에 성공을 하고 있다. 영화는 집안 사정으로 산골짜기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어린 도시 손자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생활방식과 세대차이에서 오는 짜증스러움을 애꿎은 외할머니에게 화풀이해 보지만, 대자연과 같은 외할머니의 사랑을 점차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지난해 신드롬 현상까지 일으켰던 <친구>처럼 <집으로...>도 거의 국민적 정서라 할 만한
'외할머니'라는 소재를 겁없이, 그러나 적절히 활용하여 적극적인 마켓팅과 눈부신 언론 플레이를 통해서 영화 흥행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처럼 부산을 떨어대고 있다.

물론 온통 조폭들의 피튀기는 쌈박질이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개그가 아니면, 엽기적이고
가학적이며 어이없는 슬랩스틱이 난무하는 가운데 <집으로...>와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비록 조재현이라는 배우에 기댄 탓이라 하더라도, <나쁜 남자>의 대중적 관심도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으며 <생활의 발견>과 같은 영화가 흥행면에서 비교적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후에 이어지는 '비교적' 비상업적인 영화의 흥행몰이이기에 이제 우리의 영화시장과 저변도 점차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해석도 가능할만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외할머니'와의 내 특수한 경험과 '외할머니'라는 보편적 정서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영화 <집으로...>가 상당한 완성도를 갖춘 가족용 영화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가족용' 영화라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고 보면, 더욱 그 가치를 인정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러나 나는 영화 <집으로...>를 관람하면서 많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의 원류는 외할머니와 관련한 내 특수한 경험이, 영화에서 묘사된 외할머니의모습이 너무 가혹하게 표현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데에서 기인하였고, 그것이 상업적이며 극적 감동을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되었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불편함은 불쾌함으로 변했다.

그렇게까지 외할머니를 가학해야만 했을까?

그렇게까지 외할머니의 모습을 추레하게 표현해야만 했을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우리가 '외할머니'의 사랑에 감동하고 '외할머니'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손자인 상우역을 제외한 모든 배우를 즉석 캐스팅으로 하여 타큐멘타리처럼 촬영하였다고

하지만, 영화 <집으로...>는 철저히 상업적인 영화이다. 비전문 배우의 즉석 캐스팅이나 타큐멘타리 기법을 차용한 촬영 자체까지 상업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상업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한 영화가 몇이나 되겠는가마는, 문제는 철저히 상업적인 영화이고
상업적인 마켓팅과 언론 플레이에 열을 올리는 영화가 '비교적' 비상업적인 영화로 찬양되면서 예술적 완성도까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집으로...>는 베스트 극장이나 TV문학관에서 방영하면 딱 어울릴 정도의 소재와 주제의식을 좀 더 예쁘장하고 그럴듯하게 필름으로 담아냈을 뿐이다.

영화 <집으로...>에 관객들이 몰리는 건 상업적인 마켓팅과 눈부신 언론 플레이 덕도 있지만,
더이상 조폭들의 설레발과 과장된 슬랩스틱을 관객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속도로 성숙된 관객들의 욕구는 좀 더 다양하고 신선한 영화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쁜 남자>, <생활의 발견>, <집으로...>로 이어지는 관객들의 행렬이 그 영화들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나쁜 남자>와 <생활의 발견>의 경우 김기덕과 홍상수가 자신들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써 왔던 코드와 서술방식, 주제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김기덕이나 홍상수의 영화를 처음 접한 관객이야 신선했을지라도, 그들을 계속 지켜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한계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 보였고 그들의 소위 '작가주의적' 영화의 정체를 회의하게 만들어 버렸다.

<쉬리>로 시작된 한국 영화의 중흥은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한국 영화의 관객층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그 관객층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엇비슷하고 고만고만한 복사판들을 양산해냄으로써 남들 다 보는 영화라니까 오랜만에 극장 한번 찾아온 관객들의 발길에 소금을 뿌려댔고, 이제 그 거품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가고 있다.

한국 영화의 진정한 발전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쁜 남자>, <생활의 발견>, <집으로...>와 같은 '비교적' 비상업적이면서 평론가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와 추종 일색이 아니라 좀 더 냉정하고 혹독한 비판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