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지들끼리 나눠먹는 잔치가 영 달갑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기에 의식을 하고 보고자 했던 건 아니었는데, 잠들기 전에 티비나 좀 볼까 채널을 돌리다가 딱히 볼만한 게 없길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쯔이의 우아한 자태

<와호장룡>이 몇 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으니 혹 장쯔이의 자태라도 함 비칠까 하는 바램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바라던 장쯔이의 자태는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오스카 트로피가 이 시대 최고의 영예인양 호들갑을 떨어대는 수상자들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감독상을 수상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멘트는 인상적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일일히 찾아가 인사할 것이고, 이 자리에서는 창조적인 작업을 위해 매진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책, 영화, 음악, 미술, 사진, 춤 등등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그러한 창조적인 작업들에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과의 교감이 없었다면 삶이 이처럼 풍성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멋진 놈 스티븐 소더버그

정확하게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이런 요지의 수상소감이었다.

우리가 소위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접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바로 이런 교감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떠한 예술 속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교감은 단순히 감각적 쾌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정신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고와 인식의 깊이를 변화시키고 때때로 지금까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인생관까지도 재고케 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의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사회적 폭력을 유발시킨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 인간의 행동 동기를 두고 예술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었다. 결국 예술은 인생의 재구성일 뿐이지 인생을 창조하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견해가 다르다. 나는 궁극적으로 예술은 인간 행위의 동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영향을 인간의 의식에 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 속에서 우리가 주제를 찾고 철학을 부여하고 예술가의 인생과 경험과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에 공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만 그 예술 속에서 말초적인 자극만을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말초적인 자극만을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너 꼴통? 깝죽대다간 죽는 수가 있다~잉

감각적인 테크닉 면에서 가이 리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듯 하다. <스내치>는 전작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보다 스타일과 기교면에서는 훨씬 더 화려해지고 훨씬 더 교묘해지고 훨씬 더 치밀해졌지만, 그와 비례해서 훨씬 더 시시해져 버렸다.

사실 <저수지의 개들>의 시나리오에 <트래인스포팅>의 기교를 혼합해 놓은 잡탕찌개같은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도 시시하기는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런 아류라도 신선함이 약간은 느껴질 수 있었던 3년 전이었다. 그런데 무려 하나의 밀레니엄이 뒤바뀐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포장만 다르게 한다고 해서 여전히 신선할거라고 믿었다면, 관객을 과소평가했거나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가 아류의 한계를 넘지 못한 건 스타일과 기교만이 영화의 전부라고 착각한 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스내치>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치기어린 농담처럼 툭툭 내던지는 스타일과 기교로 1시간 40여분의 러닝 타임을 때우고 있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사건들을 잔뜩 풀어 놓은 다음 그것을 해결하려다 보니 또다른 사건들이 잔뜩 꼬여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듯 보이게 하여 대단히 치밀하고도 정교한 구성같아 보이지만, 그 시나리오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온통 조잡한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순전히 우연으로 사건이 꼬여졌다가 순전히 우연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우연을 스타일과 기교로만 가려 보려고 하니 그 꼴이 어찌 한심해 보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스타일과 기교의 단순성을 단순무식하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반전이라는 걸 낑궈 넣어 봤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전은 반전의 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또한 엉성한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극단적으로 희화화되어 있는데, 캐릭터의 극단적인 꼴통화는 그 캐릭터를 통해서 냉소적인 똥침을 가할 수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지 꼴통을 위한 꼴통화는 비사실적인 괴리감에서 빚어지는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저수지의 개들>이나 <트래인스포팅>과 그 아류인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의 차별점이다. 시각적인 터치건 청각적인 굉음이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쾌감이 그 쾌감 자체로 끝나지 않고 관객과의 '교감'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냉소적인 똥침'으로라도 정신의 영역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단순히 스타일과 기교의 나열에 그친다면,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환상적이고 정교하며 화려한 영화적 기교에 감탄을 연발했지만 정작 그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니덜, 꼴통이라고 깝죽대는데 진짜 꼴통한테 까불다간 죽는 수가 있다'라는 덜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영화학교에서 습작할 때나 써먹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