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m, 譫妄, 망상...

딴지 영진공 비됴 검열위
2002년 4월

 

자~ 왔어요, 왔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냐. 애덜은 가, 애덜은 가.

코딱지만한 나라에 800개가 넘는 영화관이 우후죽순 솟아있고, 백화점을 지을래두 멀티플렉스가 들어서야만 건축허가가 떨어질 지경이며 연간 5천만명 이상의 영화인구가 극장을 찾는다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때는 바야흐로 따땃한 햇살이 아침마다 똥꼬를 찔러대는 초여름. 

니덜의 명랑 영화관람 추구권을 위하야 단 하루도 편히 발뻗고 디비져서 콧구멍 귓구멍 정화작업에 전념해 보지 못하고 있는 본 공사, 어떡하믄 니덜의 나른하고 궁상시러운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것인가까지 고민하다 보니 봄맞이 특별 기획 씨리즈를 통해서 갖가지 기능성 비됴들을 소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도다.

그렇담 본 우원이 오늘 들고 나온 비됴들은 또 무어냐? 미제 및 국산 영화는 다 거기서 거기 같고 도대체가 신선함을 못 느끼는 미제 및 국산 영화 불감증 환자덜은 물론이요 유럽 및 제3세계 영화들은 무조건 몽조리 난해하고 지루하기만 하다는 후천성 편식증후군 환자덜에게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비됴들로서 동네 비됴가게 어디를 가도 구석탱이 어딘가에 하나쯤은 짱박혀 있는 작품들 되겠다. 

자, 따라와라. 쪼메 지루한 것 같아도 볼 만한 구석들이 있는 필관 비됴들이니까.


성스러운 피 (Santa Sangre)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89년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공동 제작한 것으로 그 이름도 졸라 컬트틱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역작 되겠다. 당 영화를 이야기 하자면 당 영화에 각본, 감독을 맡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를 먼저 디벼볼 필요가 있으므로, 과연 이 넘이 어떤 넘인가 보도록 하자. 디벼보기 싫어도 본 우원이 디벼보기로 작정한 이상 걍 디벼보자. 

칠레에서 태어난 러시안계 유태인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25살까지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떠돌아 댕기다가 파리로 건너가서 팬터마임의 대가 에티엔느 두크레에게 마임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때 같이 수학한 동기가 마임의 피카소라 불리는 마르셀 마르소이다. 조도로프스키가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유유가 상종한 모양이다. 

당시 조도로프스키는 팬터마임에 관한 영화와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을 영상화한 실험적인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동네 카페에서 상영하였는데, 들리는 바로는 그 영화들을 보고 사람들이 환장을 했다고 하고 그 중에 한 넘인 장 콕도는 "따거"를 연발했다고 하는데, 장 콕도가 그 당시 중국어를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 영화에서도 졸라 현란한 마임쇼가 등장하는데 그거 보는 재미만으로도 벌써 본전은 충분히 뽑을 수 있으리라 사료됨이다. 

이후 조도로프스키는 리들리 스콧, 테리 길리엄, 오시이 마모루, 피터 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만화작가 뫼비우스(SF 만화 잡지 메탕 위를랑(미국의 성인만화잡지 헤비메탈의 전신)을 창간, 그래픽 아트를 연상시키는 신비롭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쟝 지로가 본명이란다)와 <잉칼:존 디풀의 모험>을 작업하였고, 67년 <판도와 리스>로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70년 <엘 토포>라는 컬트 영화의 고전에서 감독, 주연, 각본, 음악, 미술 등등 1인 9역을 맡아서 혼자 다 해처먹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엘 토포>가 얼마나 뻑가는 것이었는지 이 영화에 감동 먹은 넘들이 앤디 워홀, 믹 재거, 데이빗 보위 같은 희대의 싸이코들이었고, 존 레논은 <엘 토포>에 허벌나게 심취한 나머지 이 영화의 판권을 아예 구입해 버려서 <엘 토포>의 전 세계 판권은 애플 레코드사가 갖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후 이 넘은 장장 10년 동안 영화 <사구>를 제작하려고 똥꼬털에서 땀방울 떨어지게 뛰다니가다 지 아들인 보론키스 조도로프스키와 오손 웰즈, 살바토레 달리, 글로리아 스완슨 주연으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상영시간을 16시간짜리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우덜이 알고 있는 영화 <사구>는 데이빗 린치에 의해 만들어진다. 

데이빗 린치의 <사구>는 80년대 초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 필적할만한 철학적 SFX 대서사시로 완성되었는데, 조도로프스키는 이 영화를 보고 "질투 때문에 일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 넘의 황당한 똥고집으로 만들려다 무산된 또 하나의 영화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걸작 <네이키드 런치>가 있다. 

아이, 씨바.. 그런 넘이야? 그럼 <성스러운 피>는 안봐도 파노라마라구 단정지어 버리는 불순 반동 세력 있을 줄 안다. 글타. 사실 <성스러운 피>도 거기에 등장하는 신화와 상징, 은유와 전설을 일일이 해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좌측후두부경련 후 마비현상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관람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때에 따라서 영화는 그저 보여지는 그대로의 이미지와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우덜의 가슴에 삘 꽂히게 할 수도 있다. 당 영화 <성스러운 피>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관람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20여년전 멕시코에서 한 젊은 남자가 30명의 여자를 살해하여 정원에 파묻어 버린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당 영화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대립되는 색의 이미지와 멕시코의 거리음악을 환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로 펼쳐 보인다. 그렇게 색의 이미지와 환각적인 음악으로 펼쳐주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젖어서 당 영화가 그저 보여주는대로 니덜의 가슴을 열어두다 보면 경험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니덜의 영혼에 잊을 수 없는 컬트의 매혹적인 상처가 생기는 것을. 

한가지 조까튼 점은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무리 얘길 해도 도대체가 안심을 못하시는 우덜의 자애로우신 가위손들께서 우덜의 상처가 너무 깊어지는 것을 염려하시어 일정 시퀀스를 통째로 들어내 버리거나 군데군데에 자애의 흔적을 툭툭 흘려 놓으셨다는 점이다. 당 영화를 관람하기에 앞서 그 분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떠올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불끈 들어올려 경의를 표해주기 바란다. 


순수의 비행(La Corsa Dell'Innocente)
 

 

상처난 영혼을 오래 끌어앉고 있으면 정신이 황폐화된다. 황폐화된 정신을 걍 놔두게 되면 어차피 조까튼 세상이니 명랑사회 건설해서 모하냐는 네거티브적 허무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최근 반장선거 후보에 출마하려다 줄반장 후보 경선에서 노풍에 물먹은 인죄가 네거티브 전략을 써먹더니 결국은 니덜끼리 다 해먹으라면서 줄반장 후보 경선에서도 사퇴하여 판을 깬 걸 보믄 네거티브란 어쨌든 명랑사회 건설에 불필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오매불망 명랑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본 공사의 이념에 따라 본 우원 역시 니덜이 네거티브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가 엄따. 그러므로 상처난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당 영화를 강력히 권하는 바이다. 본 우원, 어쩌면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지 몰겠다. 보고 배우길 바란다.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92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동 제작한 것으로 각본과 감독을 맡은 카를로 카를레이의 썩 훌륭한 데뷔작 되겠다. 난중에 이 넘이 헐리웃에 진출하여 만든 <플루크>는 굳이 이 넘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아도 양산해 낼 수 있는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이지만, 이 넘이 <순수의 비행>에서 보여준 놀라운 참신성은 <플루크>와는 그 격조에 있어서 비할 바가 아니므로 혹여 <플루크>로 인해서 당 영화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당 영화는 자고 깨면 총질을 일삼는 마피아 가문에서 태어난 천진난만 순진무구의 소년 비토가 경쟁관계의 마피아 조직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까지 죽이러 쫓아오는 킬러를 피해 도망댕긴다는 이야기 되겠다. 잔혹하고 무자비하며 고래심줄같이 끈질긴 킬러, 아슬아슬하게 도망댕기는 쥔공, 사정없이 죽어 나가는 쥔공 주변 인물들, 어디선가 많이 본 뻔할 뻔짜 스토리라고 눈치까는 넘들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누누히 강조하거니와 영화의 쉣스러움은 스토리의 진부함이 아니라 진부한 스토리를 얼마나 영삼스럽고 고리타분하게 늘어 놓느냐 하는 데에서 쉣스러움의 가공할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당 영화는 그 진부한 스토리를 속도감 넘치는 편집과 사실적인 화면을 통해서 매끄럽고 흥미진진하게 연출하여 시종일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면서도 폭력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순수한 한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거 이거는 니덜의 정신 건강에 유익하므로 잘 따라서 하고, 저거 저거는 니덜의 정신 건강에 유해하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좃선식 계몽주의를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보편타당하고 순수한 선이 비타협적이며 폭압적인 악에게 쫓기고 내몰리고 위협받고 살해당하는 과정을 어설픈 극적 겐세이 없이 담담하고 섬세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우덜 안의 따사롭고 부드러우며 순수한 감성을 지긋이 자극한다. 


퍼니 게임(Funny Games) 

<순수의 비행>이 우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의 관점에서 폭력을 바라보았다면, 당 영화 <퍼니 게임>은 우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의 관점에서 폭력을 바라본다. 당 영화가 전율스러운 것은 단지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나도 흔해 빠져서 일상화 되어 버린 폭력의 적극적인 공범자 내지는 동조자 혹은 방관자로 우덜을 끌어 들인다는 점이다.

당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1997년 독일에서 제작한 것으로 독일 태생의 오스트리아 거장 미카엘 하네케의 살떨리는 걸작 되겠다. 미카엘 하네케는 폭력 3부작이라 불리는 <7번째 대륙> <베니의 비디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을 통해서 아는 넘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름 꽤나 날렸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본 우원 폭력 3부작 중 하나도 본 게 없어서 폭력 3부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몰겠다. 

또한 작년에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 남녀주연상을 휩쓴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노 선생님>이 온갖 찌라시에서 오도방정을 떨며 찬양되어지길래 국내 개봉이 이루어질 줄 알고 목 빼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개봉의 개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 영화 <퍼니 게임>을 보구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지는 넘들 중에서 혹 생활이 넉넉한 넘이 있다면, <피아노 선생님>두 수입하여 국내에 개봉해 주기 바란다. 

생활이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본 우원의 간절한 염원을 쌩까는 넘이 발각될 시에는 계란을 빌리러 가게 됨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근데 이건 당 영화가 보여주는 줄거리이기도 하다. 당 영화는 본 우원의 강짜처럼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는 한 가족의 수난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호숫가 별장에 당도한 게오르크 가족에게 옆집에서 심부름 왔다는 낯선 청년이 계란을 빌리러 온다. 선선히 계란을 내주며 포장해 주겠다는 계란을 덜렁덜렁 들고 나가던 이 넘, 계란 4개를 들고 문을 열려다 바닥에 깨먹어 버린다. 

근데 계란을 깨먹고 졸라 미안해 하던 넘이 자기는 단지 계란을 빌리러 왔으니 다른 계란을 빌려 달란다. 딱 적반하장이다. 슬슬 기분이 조까타지기 시작하지만, 이웃과의 친분을 생각해서 다시 빌려 주려고 하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핸펀을 물에 빠뜨려 버린다.

짜증으로 꼭지가 돌 지경이지만, 실수를 미안해 하면서 실실거리는 넘에게 대놓고 화를 내는 것도 우습다. 서둘러 계란을 꽁꽁 포장하여 건냈더니만 계란을 들고 나갔던 넘이 개가 덤벼들어서 또 깨먹어 버렸다고 유들유들 뺀질뺀질한 넘과 같이 찾아와서는 계란을 다시 빌려달라고 생떼를 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격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게오르크 가족은 계란을 줘서 이 넘들을 쫓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넘들에게 계란은 그저 빌미일 뿐이었다. 

계란을 받아 든 이 넘들은 골프채를 휘둘러 대면서 게오르크 가족의 신경을 건드리고 마침내 더러운 똥을 적극적으로 치우려는 가족에게 똥도 무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이 넘들의 뻔뻔함을 더이상 참지 못해서 쫓아내려는 남편 게오르크는 골프채에 다리가 또각 부러져 버린다. 

이제 재밌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살아남을 것. 과연 게오르크 가족은 그저 재미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이 넘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넘들은 그 게임의 공범자 내지는 동조자 혹은 방관자로서 바로 당 영화를 보고 있는 우덜 자신을 지목한다. 수많은 액숑 영화와 폭력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폭행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우덜에게 이 넘들은 우덜도 이 게임에 동참할 것을 속삭이고 채근하다가 윙크까지 해댄다. 


97년 제 50회 칸에서 불쾌한 장면 몇 있음이라는 경고성 멘트가 덧붙여져 상영된 당 영화는 그 불쾌함이 결국은 우덜 자신이 속으로는 은밀하게 원해왔던 것 아니냐고 뻔뻔스럽게 충동질한다. 그 충동질은 기존의 헐리웃을 비롯한 온갖 상업적 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며, 그 비판을 미카엘 하네케는 기존의 영화적 관습의 테두리를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다. 

롱 테이크. 많이 들어 본 업자 용어일 것이다. 이른바 길게찍기 혹은 오래찍기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샷을 끊지 않고 한 번에 쭈우욱 찍는 걸 말한다. 롱 테이크가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롱 테이크, 롱 테이크 해대냐고 하는 불한당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롱 테이크 이거 정말 어렵다. 생각해 봐라. 샷을 딱 딱 끊어서 찍으면, 잘못 찍을 경우 고 샷만 다시 찍으면 되지만, 최소 2, 3분에서 길게는 10분이 넘는 샷을 다 찍었는데 잘못 찍었을 경우 다시 찍을려면 필름값이 얼마나 더 들겠냐? 필름값 이거 장난 아니다. 그러므로 롱 테이크 이거 아무나 막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 영화에서는 순전히 실수로 어린 아들이 젤 먼저 죽어 버리는데, 아직 죽이면 안돼는데 벌써 죽여 버렸다고 두 넘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싸우다가 게오르크와 아내를 묶어 놓은 채 어딘가 나가 버린다. 


어처구니없는 또라이 두 넘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하고만 있던 부부에게 어린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얼마만한 청천벽력이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당 영화는 딱 세 번의 팬(카메라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 카메라 헤드만을 좌, 우로 회전시켜 촬영하는 방식)만으로 10여분에 달하는 엄청난 롱 테이크를 선사한다. 안타까운 것은 필름으로 영사되어 볼 때보다 비됴로 볼 때 당 영화가 비교적 어두워져 보이는 탓에 이 전율스런 롱 테이크 장면이 필름으로 봤을 때 만큼의 감동을 비됴로 첨 봐서는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짤 수 있겠는가? 극장에서 못보면 비됴로라도 봐야지. 대신 좋은 동네 사는 독자라면 오백원으로도 빌릴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상으로 니덜 살아 생전에 한 번쯤은 꼭 봐 두어서 명랑 영화관람을 위한 정서 함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아닐지는 니덜 알아서 하고) 유럽 및 제3세계 비됴 3편을 디벼보는 유익한 시간을 본 우원과 함께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매우 훌륭한 비됴들이 많이 있으나 누차 말했다시피 본 우원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다. 추후 기회가 되믄 새로운 비됴로 다시 만나도록 하자. 이상, 졸라. 

딴지 영진
유럽 및 제3세계 무비 전문 디빌링 우원
백운수